▨… 정승 홍섬이 대궐 뜰에서 형벌을 받고 남쪽으로 귀양 갔다. 귀양 길이 금강에 이르자 과거 보러 서울로 가던 선비들이 길에서 보고 있었다. 금호 임형수가 와서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들으니 경성에 홍섬이란 분이 있어 당대에 좋은 선비라 하더니 무슨 죄가 있어 이 지경이 되었는가. 어찌 지금이 군자가 과거 볼 때인가” 하고는 경성으로 가지 않고 말을 돌려 돌아갔다. 홍섬이 누웠다가 그 말을 듣고 “정신이 상쾌하다”고 하였다. (한글·민병수, 한국인의 지혜)

▨… 이 시대 호남의 열혈한(?)들은 전라도 천년의 얼굴로 임형수를 꼽기도 했지만 김세곤(호남역사연구원장)은 왕의 뒷전에 숨은 권력의 실세에 맞서는 임형수를 드러내 우리에게 호남인의 결기를 맛보게 해준다. 당시 권력의 실세인 윤원형이 제주 목사로 부임하는 임형수를 떠보려고 송별연을 열었다. “자, 어서 드시지요, 부제학” 임형수는 윤원형을 말끔히 노려보다가 한마디를 던졌다. “공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 주량대로 마시리다.”

▨… 임형수는 21세인 153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풍채가 좋고 활쏘기와 말타기도 잘해서 사람들이 나라의 대들보라 여겼다. 그러나 역사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서 1547년 9월 21일, 겨우 서른 세해를 산 나이에 정언각의 상소로 임형수는 사약을 받았다. 사약을 마시려던 임형수가 의금부 서리를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도 한 잔 마시겠는가?’ 하였다. 임형수는 사약을 열여덟 사발이나 마셨는데도 죽지 않아 목졸임을 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이 시대 호남인들이 전라도 천년의 얼굴로 임형수를 꼽는다면, 이 시대의 성결인들은 성결인 일백년의 얼굴로 문준경(1891~1950)을 꼽고 있지 않을까. 임형수의 호남사람다운 결기가 사약을 받게 되는 원인이라면 문준경의 신앙심은 성결인답게 그녀의 순교를 부르는 원인이었다. 목포인민위원회에 끌려갔던 문준경은 이성봉 목사 등의 만류도 뿌리치고 증도로 돌아왔다. 자신이 돌보던 교인들이 그곳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유대인 랍비 몬테피오레가 증언했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는데도 하나님은 그 떠나버린 인간을 찾으신다고… 목포 북교동성결교회에서 하나님을 맞이한 문준경은 어찌 지금이 군자가 과거볼 때인가 자문하며 발길을 돌린 임형수처럼 삶의 발길을 돌려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그 길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는 십자가의 길이었다. 이제, 자문하자. 성결인 목회자인 나는 문준경처럼 십자가의 길에 진정 바로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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