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번의 군대생활과 신앙생활의 시작    

故 임종렬 목사

방학 중인 8월에 갑자기 그에게 입대영장이 나와 광주 예비사단으로 입소했다. 당시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미처 북으로 도망가지 못한 공산군들이 지리산에 깊숙이 도피하면서 먹고 살기 위해 밤중에 산간마을을 자주 습격하여 주민들을 괴롭혔다.

이런 소식이 계속 신문에 나자, 당국은 군인이 모자라 긴급조치로 예비사단에서 19세 청소년들을 소집하여 공비 소탕작전에 투입하기로 했다. 


소집된 청소년들은 한 달 동안 훈련을 받고 순천과 여수까지 가서 M1총을 들고 순천농고에서 낮과 밤을 교대로 잠복근무하였다. 

어느 날 수도사단이 보충병 차출을 위해 순천으로 내려왔다. 학도병 중 신체검사를 통해 합격하면 군번을 주고 현지입대를 시켰다. 임종렬은 그때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해 귀가조치 당했다.

집에 돌아온 후 중학교 6학년에 복학하였다. 그는 당장 학비를 걱정했으나 1개월 후, 학도병으로 입대한 사람은 졸업을 인증하도록 되었다는 사실을 통고 받았다. 더 배우고 싶었으나 스스로 학비 벌어야했기 때문에 졸업장을 받고 말았다. 그때는 몰랐으나 나중에 신앙생활을 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도움이었음을 깨닫고 감사하였다.

그러나 졸업한지 1년 만에 정식 소집영장이 나왔다. 그는 제주도 제1훈련소에 입소하고 신체검사에 합격하여 3개월의 훈병생활을 했다. 그리고 하사관학교에 입교하여 하사로 임관한 후, 제주도 제1훈련소 기관요원으로 4년 동안 근무했다. 

그는 훈련소 연대본부 인사과에 근무했다. 인사과는 인사행정을 처리하는 곳인데 하사, 중사, 상사는 물론 장교들에게 진급을 위해 은근히 뇌물이 오고가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직을 삶의 신조로 알고 일했으므로 그의 정직함이 점점 인정을 받아 나중에 부대장의 표창장을 2개나 받았다. 

그의 신앙은 군에서부터 싹튼다. 그때는 군목 초창기여서 아직 계급 없는 촉탁 군목들이 있어 주일마다 천막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는 문득 임씨 종친 중 임기봉 목사가 생각났다. 종친들은 거의 유교인데, 임기봉 씨가 일본유학 후 예수 믿고 목사가 되었다. 

임목사는 해마다 모이는 종친회에 와서 ‘예수 믿고 구원 받고 복 받으라“고 전도했으나 종친들은 외면했다. 그런데 그 분이 목포에서 ’노동자 대변인‘이라는 구호로 신자들과 함께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여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임씨 종친들이 더러 예수 믿기를 시작했다. 그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호기심으로 군인교회에 처음으로 출석했다. 그때 군목들의 설교가 향교의 어른들처럼 지루하지 않고 예화를 곁들이며 예수 믿으면 새사람이 된다고 열렬하게 외쳤다. 평소 정직하게살기 원하는 그의 뜻과 맞아 계속 출석했으나 세례는 받지 않았다.

1954년 10월 1일에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숙부의 전보를 받았다. 당시는 정기휴가 외는 일절 외출도 없어 부친상(喪)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했다. 아버지가 돈과 명예가 있어 장수할 것 같았지만 불과 44세에 병으로 별세했기 때문이다.

그는 몇 달 후 정기 휴가를 받아 배를 타고 목포를 거쳐 해남으로 갔다. 먼저 숙부를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리니, 형님이 자식들에게 적절히 재산을 분배하라고 자기에게 위임했다면서 그동안 고생 많았다며 위로하고 함께 묘소에 가서 참배했다. 그는 아버지가 교회에서 말하는 지옥에 갔을 것 같아 미운 마음이 사라지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그 후 부대로 복귀하여 4년 6개월 근무 후 제대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니, 앞으로 무엇하고 살아야할지 막막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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