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혁은 개혁(改革)이다. 우리 교단 교육국에서는 해마다 목회자의 설교와 성도들의 성경 읽기를 돕기 위해 교회력에 따른 예배계획 캘린더와 성서 일과표를 제공한다.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 주일로 표기하는데 이는 과거 개혁의 역사를 기념하거나 정신을 이어받는 것에서 멈추지 말고 개혁하라는 뜻이다. 개혁은 기념도 기억도 아닌, 개혁일 뿐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개혁은 시효(時效)가 없다. 개혁했던 교회, 개혁을 자랑스러워하는 교회, 개혁을 기억하는 교회는 이미 과거의 교회 구교(舊敎)일 뿐이다. 지금 개혁하는 교회라야 개신교라 할 수 있다. 생명은 개체로서 완전하지만 멈추지 않는 성장과 변화로 존재한다. 1517년 10월 31일 시작된 개혁은 개신교의 출발이지만 그 때에 개혁되었던 교회가 아니라 506년 동안 끊임없이 개혁하는 교회만이 오늘날의 개신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 개혁(Reformation)은 제한이 없다. 독일을 비롯한 중세 유럽에서 교회는 종교에 그치지 않고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현존이었고, 한 생명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가정과 교육, 정치, 경제, 문화, 심지어 전쟁까지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굳이 종교라는 제한된 표현이 없이 ‘개혁’이라고 했던 것이다. 교회가 먼저 제 모습을 다시 갖출(reform) 자정능력을 회복해야 우리 사회와 민족의 현실을 새롭게 할 수 있으리라.

▨… 그러므로 개혁(改革)은 과격할 수밖에 없다. 영주의 종교가 곧 백성의 종교였던 의회법에 저항(protest)하여 비난을 받던 복음적 소수자들(Protestant)의 이름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오늘의 개신교회(改新敎會)가 과연 “어떤 권력도 개인의 양심을 속박할 수 없다.”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을까? 부끄럽도록 추해지고 썩은 자기 살을 뜯어(改) 끓는 물에 삶고 과격하게 두드려 이 시대에 쓸모 있는 가죽(革)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개혁교회인 것이다.  

▨… 개혁은 회개로부터 시작하였다. 루터가 제시한 95개의 항의문에서 첫 번째 논제는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 4:17)고 말씀하신 것은 신자들의 온 생애가 참회의 삶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주님의 첫 선포와 루터의 첫 논제가 회개라는 사실. 김상준과 정빈, 카우만과 길보른이 전한 성결의 복음이 아니라 “지금 성결하라!”라는 주님의 말씀이 들려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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