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는 한 편의 영화를 제작하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흥미로운 내용들을 담고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신탁을 받은 주인공의 이념과 사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그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과 기이한 사건들이 독자의 마음을 놓지 않는다.

 본서의 도입은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욘1:1)로 시작된다. 니느웨 사람들의 만연한 죄악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를 통하여 구원을 주시고자 하였다. 

요나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위한 메신저로 선택받은 예언자였다. 그러나 요나는 이 사명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고자 했다. 본서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예언자 요나가 활동했던 시대적 상황을 보면 ‘악한 민족은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증오로 가득한 민족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요나서 1장 서두에서 보여주는 ‘요나의 불순종’(욘1:1~4)은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사역의 과정에서 점검해야 될 몇 가지를 가르쳐준다.

 개인적인 성향이나 사상, 신념에 사로잡힌 사역자는 때때로 사명과 거리가 먼 불순종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불순종의 일조차도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롭게 진행되기도 한다. 

“욥바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 지라”(욘1:3)라는 말씀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만난 지라’의 히브리어는 ‘마차(matsa)’인데 ‘찾다’ ‘얻다’ ‘이루다’ ‘이르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찾으면 찾을 것이요”에서 찾게 된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돼도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먼 불순종의 길은 아닌지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아울러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불순종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고 태연히 뱃삯을 지불하는 요나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른 지출의 정당함이 유지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믿음과 헌신으로 주님 앞에 드려진 헌금이 풍랑과 위기를 자초하는 불순종의 길을 닦는 데 쓰이고 있지는 않는지 말이다. ‘풍요에 취해 할 일을 잊어버린 유람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외침이 축제의 함성 속에 묻힌다면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더 큰 풍랑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요나의 여호와의 말씀 거역 행위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 요나서 1장 4~5절은 큰 바람에 의해 폭풍이 일어나 배가 좌초될 위기에 처했음을 보여준다. 바람과 큰 폭풍 속에서 사공들이 자신들의 신을 부르며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하나님의 시선은 요나에게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 지라.” (욘 1:5) 독자들의 한탄과 한숨을 불러올 만한 극적인 대비가 아닐 수 없다.

요나의 불순종의 결과로 함께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고난을 겪게 된다. 한 사람의 불순종이 모두에게 아픔을 가져다주고 있다. 왜 사명자로 부름 받은 일꾼들이 자신의 성향과 이념과 신념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론으로 공동체에 위기가 찾아오는 이유는 요나 같은 사람들이 근신하지 않고 잠을 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공교회의 한 몸 됨을 무너뜨리면서도 공동체의 위기를 무시하는 악하고 게으른 일꾼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순종으로 자신과 공동체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지 않은지 늘 성찰해야 한다. 회개와 순종은 우리에게 속하였고,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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