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로 엮는 성결교회 이야기 1380
불우한 성장 시기

故 임종렬 목사
故 임종렬 목사

임종렬(林宗烈)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2년 6월 7일에 우리나라 ‘땅 끝 마을’로 알려진 전남 해남에서 출생했다.

불행하게도 그가 출생하자마자 부모가 이혼했다. 아버지는 당시 평양의전을 졸업하고 고향인 해남에 내려와 의사로 개업한 유명인이었다.

한의사인 조부가 택한 얌전한 처녀와 강제로 결혼했지만 조부가 죽어 자유를 얻고 아내가 아들을 낳자마자 협의이혼하고 신식 여자와 재혼했다. 전 부인과 아들을 위해 겨우 생활비만 대주므로 종렬은 외갓집에서 외롭게 자랐다.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아버지로부터 수업료는 지원받았으나, 누구보다 의사로 유명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떳떳하게 부를 수 없는 것이 큰 한(恨)이었다. 학교에서 학부형을 소집할 때도 오시지 않아 농부인 아버지를 모신 친구들을 부러워한 적도 많았다.

그는 1945년 3월 읍에 있는 해남중학교에 입학하여 매일 8km를 걸어서 학교에 다니다가 여름방학인 8월 15일에 해방을 맞았다.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해방 만세”를 외치고 다녔다. 그동안 한글 과목을 폐지하고 일본어만 배운 설움에 울컥했다.

9월, 일본인 교사가 사라지고 한국인 선생들이 한글을 가르쳐 나라 찾은 기쁨이 좋았다. 그러나 어머니와 사는 그의 형편은 어려웠다. 매월 보내주는 작은 생활비와 수업료 외에 돈이 없어 교양서적을 사지 못하고 친구들의 책을 빌려서 읽었다.

해방 후 3년 간은 건국하기 전 전국적으로 미국-소련의 신탁통치 결의에 대한 찬탁과 반탁 의견이 분열되어 패거리 싸움이 많았다. 그의 윗마을은 반탁, 아랫마을은 공산당의 선전으로 친탁으로 학생들 끼리 가끔 대립했는데, 어느 날 그가 아랫마을 상급생들 앞을 지나가다 붙잡혀 그들에게 맞아 얼굴이 크게 붓는 부상을 당했다. 

이를 알게 된 윗마을 상급생들이 모여 복수전을 펼치기로 했는데, 그 소식을 알게 된 그가 적극 말렸다. 동족끼리 의견이 다르다고 서로 싸우면 언제 우리나라가 건국을 하겠느냐고 강하게 주장해 결국 복수전을 펼치지 않고 서로 화해를 하기도 했다.

점점 사리 판단력이 생겨나자,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생겼다. 재혼해 낳은 4남매는 부잣집에서 아주 잘 살고 있단 소식을 가끔 들었기에 마침내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 부쳤다.

그는 편지 서두에 ‘아버지께 올립니다’라고 쓰면서 울먹였다. 생전 처음 글이나마 ‘아버지’라고 불렀으니 감개가 무량했다. 글의 요지는, 저울도 한쪽이 기울면 안 되듯 아버지도 균형 있게 생활지원을 해달라는 사리에 맞는 간청이었다. 

그러나 이 편지를 받은 아버지는 크게 노해 ‘양호우환’(養虎憂患)이란 말로 그를 매도했다. 즉, 호랑이 새끼를 길렀더니 집에 큰 걱정이 되었다는 것으로, 학비를 대주며 갈 곳 없는 그를 길렀더니, 이제 글로 아버지를 충고했다는 것이다. 학비도 끊어졌다.

이를 계기로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외갓집에서 나와 가까운 동네에 주인 없는 빈집으로 들어가서 먹으나 굶으나 어쩔 수 없이 살아야했다. 어머니는 아무런 경제적 능력이 없었기에 그가 읍에서 신문배달로 고학을 해야 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겨우 숨어 살았고, 이듬해 중학 5년 1학기를 마쳤으나 수업료를 납부하지 못하고 여름방학을 맞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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