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에 접어들자 세계는 예측할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워낙 체급이 다른 나라 간의 전쟁이어서 단기적으로 마무리될 것이라는 예측이 대부분이었다. 그 예측은 무너졌다. 그런가 하면 정보전의 첨단을 달린다는 이스라엘이 눈 멀뚱하게 뜨고 장난감 같은 하마스의 로켓 ‘까삼’의 공격을 3,000 내지 5,000 발이나 맞는 사태가 빚어졌다. 언제나 그렇듯 전쟁은 세계사의 진전을 낙관하는 사람들의 예측을 비웃고 유발 하라리의 표현을 흉내낸다면 새로운 전쟁이 터질 때마다 우리는 에덴의 낙원으로부터 몇 킬로미터씩 멀어지고 있다.

▨… 기원전 11세기, 에브라임 지파와 길르앗 지파는 전쟁을 벌였다. 패배한 에브라임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요단강 나루에 모였다. “쉽볼렛”이라는 발음을 해보라는 검문을 통과하지 못한 에브라임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때 죽은 에브라임 사람이 4만 2천 명이었다.(사사기 12장) 퇴로가 끊어진 가자지구에 갇힌 120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마스를 따르든, 반대하든 에브라임 사람들처럼 돌아갈 길이 없게 되었다. 자신의 의지를 주장할 수 없는, 철창없는 감옥에 갇혀버린 것이다. 

▨… 이스라엘의 네타냐후는 “우리는 반드시 하마스를 분쇄하고 파괴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기습으로 허를 찔린 전쟁을 하도록 만든 하마스에 대한 분노로 자신을 불태울지도 모르는 네타냐후라고 한다면, 오판일까. 전쟁은 언제나 비인간화된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지만 전쟁은 또한 언제나 인간을 비인간화 한다. 데이비드 리빙스턴 스미스에 의하면, “비인간화는 세계 곳곳의 문화에서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우리 모두가 비인간화의 표적이 될 수 있는 것은 물론 비인간화의 주체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이하)

▨… 평화를 동경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꿈꾼다. 이 꿈을 역사의 현장에서 이뤄내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이라는 비인간화한 수단까지도 ‘의로운 전쟁’ 이라는 이름으로 수용하려고 몸부림쳤었다. 그러나 대량학살이라는 비인간적인 수단이 전쟁의 승리를 담보하고, 그 승리로 하나님의 의를 대신하려는 음모가 기승떠는데 교회는 무엇을 해야하고 할 수 있는가를 이제는 진실하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 <자신을 향해 묻는 질문> 핵폭탄 앞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믿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 아니, 그 믿음으로 살 것을 다짐한 적이 있기는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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