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은 고향과도 같은 주님께 속한 삶을 살지 않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세상 사람의 삶을 살고 있다

가끔씩 토요 새벽 기도가 끝나면 차를 타고 들길을 따라나선다. 왜냐하면 성도는 들길/광야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들길을 걷다 보면 자연의 소리, 들길의 소리, 광야의 소리를 들으며 다시 고상 소박 여지를 다짐한다. 단순 소박한 자연을 망각한 채 인위적이고 복잡한 기술만을 추구하는 우리 시대는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궁핍한 시대라고 일찍이 하이데거는 말했다.

들길의 소리는 들길의 공기에서 태어나 들길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한다. 들길의 소리는 망각된 존재를 상기시키는 우리의 목소리를 많이 닮았다. 그래서 들길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그것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자가 되어 고향의 맛을 볼 수 있어서, 적어도 조작적인 사물들의 노예나, 기계의 소음을 신의 소리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고향의 고(故)는 ‘예스러움’ 내지 ‘오래됨’을 말하기에, 우리가 적응하기에 예스러운 안정된 삶의 세계이다. 물론 고향의 고(故)는 ‘떠나온’이란 의미가 있기에 우리가 떠나왔기에 그리워하는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향은 무엇인가 감춰져 있는 순수한 삶의 세계, 아직 순수성을 간직한 세계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고향은 자연에 안겨 있는 아늑한 곳이고, 가정의 연장이고, 혈연적, 지연적 유대감과 서로에 대한 애정이 지배하기에 동일한 언어와 관습 그리고 전통을 공유하는 곳이다. 이는 전광식의 책 “고향”에서 말한다. 그래서 고향은 현대기술문명에 대한 대칭 개념이다.

현대인들은 단순 소박한 자연을 망각하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고향을 망각하고 있다는 데 위험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이런 시대에 망각된 것을 상기시키고 다시 고향을 건립해야 할 것이다. 고향은 단순히 물질을 평등하게 분배하고 사회를 자유롭고 정의롭게 만드는 것에 의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단순 소박한 자연의 소리 같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말씀의 빛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터전이 고향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고향과도 같은 주님께 속한 삶을 살지 않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세상 사람의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요즘 유튜버와 인스타그램에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가 구원자로 행세한다. 팔로워는 신봉자로서 인플루언서의 삶에 참여하여 소비하는 상품을 구매한다. 팔로워는 인플루언서가 연출한 일상을 소비한다. 그래서 팔로워는 디지털 성찬식에 참여하고, 좋아요는 아멘 이고, 공유는 성찬식이며, 소비는 구원이다. 인플루언서들의 반복은 전체에 예배의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이처럼 인플루언서들은 소비 상품을 자기실현의 도구로 느껴지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도록 실현하면서 죽도록 소비한다.

이처럼 하이데거는 현대기술문명의 위기는 고향의 상실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은 늘 공허감과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끊임없이 기술을 개발하고 물질적인 소비와 향락을 추구한다. 물질적 풍요로 대체할 수 없는 본질적인 궁핍으로 둘째 아들(누가 15장)은 고향으로 돌아온다.

살아계신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과 함께 잠시 어색한 빈공간을 메우기 위해 잔치/감사를 배설한다. 이번 감사절에는 나도 그 아들처럼 아버지가 계신 영혼의 나라에 그 아들 주신 마음의 고향에서 은혜, 믿음 그리고 성결만 추구하며 영원히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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