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가면서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처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특별히 모든 상황이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펼쳐질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모든 상황이 지나고 보면 하나님이 왜 그렇게 인도하셨는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섭리에 감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탄식을 기쁨으로 바꾸시고 슬픔을 감동으로 갚아 주십니다. 따라서 불만이나 불평의 생각이 찾아올 때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모르는데 미리 속단해서 불평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라는 이름은 ‘엘’이나 ‘야’와 같이 ‘하나님’을 의미하는 ‘요’와 ‘영광’을 의미하는 ‘카보드’에서 나온 ‘게벳’이 합쳐진 이름으로서 ‘하나님은 영광입니다’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펼쳐진 삶의 상황은 그녀의 이름과는 전혀 상관없이 흘러갔습니다. 룻기에 ‘나오미’라고 하는 여인이 기근을 피해 모압 땅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남편과 아들 두 명을 잃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 때 다른 여인들이 나오미를 향하여 “이이가 나오미냐?”고 하자 나오미는 자신을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로 부르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기쁨’, ‘희락’이라는 의미로서 지금도 이스라엘의 인사 가운데 ‘나임 메오드’라는 인사법이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다는 말로서 ‘나오미’와 동일한 어근을 가집니다. 반면에 ‘마라’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고자 할 때에 지중해의 바닷물이 스며듦으로 인해 그 물이 쓰다고 느껴지자 그 이름을 ‘쓰다’라는 의미의 ‘마라’ 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나오미도 자신의 인생이 달콤하고 ‘희락’과 ‘기쁨’과는 거리가 먼 인생이라고 느낀 나머지 자신을 ‘마라’로 불러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어찌보면 이는 요게벳이 품었던 마음이었을 수 있습니다. 레위인으로서 레위인과 결혼한 요게벳은 아마도 모세를 낳았을 때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그녀의 기도와는 상관없이 딸 대신 아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인생만큼 기구한 운명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낳은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 의해서 나일강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아이를 살려둘 경우 자신의 가족이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바로의 명령에 따라 나일강에 버려져야 하는 자신의 아들의 운명을 생각하며 요게벳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의미를 가진 ‘요게벳’ 대신 ‘하나님은 내 인생을 쓰게 하셨다’라고 하는 의미의 ‘요마라’라고 이름을 바꾸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청력과 시력은 한계가 있어서 소리가 너무 크거나 작아도 듣지 못하며 너무 작아도 보지 못할만큼 제한적입니다. 그러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높고 깊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고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의 물레방아는 여전히 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감옥 안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바로에게 이상한 꿈을 꾸게 하셔서 결국 바로가 요셉을 불렀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마도 요게벳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통해 출애굽의 영광을 계획해 놓으셨고 섭리하셨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장정만 60만 3,550명이니 여성과 20세 이하의 남성들까지 포함하여 대략 20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출애굽을 하는 것을 보면서 “와 정말 저들이 출애굽을 하는구나!”하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인생에 하나님의 시간표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종종 찾아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롬 4:18).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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