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수 목사(충청지방 부르심교회)
   정문수 목사(충청지방 부르심교회)

출애굽 하여 광야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마주한 물은 쓴 물(출 15:23)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샘을 ‘쓰다’는 뜻의 ‘마라’로 이름 짓고 원망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한 나무를 가리키사 모세로 하여금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키신다.

가슴 벅차오르는 구원의 감격과 자유를 얻은 기쁨으로 들떠있을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지중해를 바라보며 걷는 편하고 쉬운 블레셋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거칠고 척박한 광야로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황량한 광야로 인도하신 까닭은 애굽의 지식과 애굽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내면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노예근성을 탈피시키시고, 생각과 가치관을 변화시키시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이 마주한 광야는 애굽의 지식과 애굽의 법이 아닌 하나님의 법과 말씀으로 훈련받는 곳이었으며 노예근성이 변하여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회복하는 곳이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믿음으로 변화되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쓴 물 앞에서 불평과 원망으로 일관했다. 히브리어로 ‘우물’과 ‘샘’은 ‘마얀(מעין)’이라 한다. ‘마얀’에는 근원, 기쁨, 즐거움 등의 의미가 있다. 또 이 ‘샘’을 ‘흐르다’라는 동사로 사용할 때는 ‘아인(עין)’이라 한다. 아인은 ‘대면하다’, ‘보이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렇기에 히브리인의 사고로 샘이 변화되는 것은 곧 눈이 변화된다는 뜻이며, 눈이 변화한다는 것은 곧 가치관의 변화를 뜻한다. 하나님께서 물이 쓰다는 이유로 원망하는 이스라엘을 위해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모세는 그 나무를 물에 던진다. 이후 쓴물은 단물로 바뀌게 된다. 이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애굽에 내린 질병을 하나도 내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출 15:23~26).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정해 주신다. 

마라의 샘은 사람의 심령에도 대입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에 담긴 것에 따라 인생의 모양 또한 달라진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세상 지식으로 젖어있는 가치관으로 산다면 그는 쓴물을 내는 인생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의 눈이 열려 말씀의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자는 단물을 내는 인생이 된다. 마라의 샘이 나뭇가지를 통해 단물로 변화됐듯, 그리스도인 또한 단물을 내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복을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 세상과 사람을 살리는 고귀한 인생이 되어야 한다.

출애굽 하여 가나안을 약속받은 자라 할지라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애굽의 지식과 노예 의식을 그대로 담고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쓴 물을 내는 인생이다. 생각과 언어에서 그대로 쓴 물을 토해내며 스스로를 메뚜기로 여기는 자들은 결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민 13:31~33).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다양한 광야 길을 마주한다. 거칠고 황량한 길에서 원망할 수도, 우리의 목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감사하며 담대히 나아갈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세상 지식으로 쓴물을 내기보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말씀을 담아 단물을 내는 자랑스러운 성결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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