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어항 주인이 어항의 관상어를 위해 물을 갈아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모든 물고기를 망으로 건져냈습니다. 물이 없는 환경에 익숙치 않은 그들은 심하게 파닥 파닥 거렸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향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물을 새로 갈아 넣은 주인은 그들을 다시 어항에 놓아 주었습니다. 

물론 어항속의 관상어들은 이 모든 과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고기들은 물 밖이라고 하는 익숙치 않은 상황에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마는 이는 분명히 관상어들을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히브리 민족이 애굽 땅에서 머물 때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나타나 그들을 학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이 왕은 힉소스 왕조를 무너뜨린 투트모스 1세로 추론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30년간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답답하였고,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물고기가 주인의 뜻을 알 리 없듯이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를 모두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점에서 출애굽기의 첫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1장 1절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더욱이 이 구절에 생략되어 있는 용어가 있는데 히브리어 ‘베’입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그리고’라고 하는 접속사인데,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출애굽기와 창세기의 이야기가 430년의 간격이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굳이 히브리어 ‘베’를 해석하지 않아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출애굽기의 서곡을 시작하는 첫 구절로서 ‘그리고’(히. ‘베’)라고 하는 용어가 더 부자연스러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많은 성경번역본들은 이 용어를 번역하지 않고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베’를 염두에 둘 때 우리는 출애굽기가 창세기와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용어는 우리에게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땅에서 살게 된 이유와 그들이 당하는 핍박이 모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안에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보여줍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12지파의 근원이 되는 야곱에게 매우 중요한 명령을 하셨는데, 그 내용은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갈 것과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스라엘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언약이었습니다(창 46:3). 즉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어쩌다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그곳으로 보내셔서 큰 민족으로 만드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약 70명 정도 되는 야곱의 가족이 그 당시 가나안 땅에 있는 강한 족속들을 상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며, 자칫 생존 마저도 위협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듯 하나, 여전히 쉬지 않으시고 일하시는 분입니다. 다만 지구 자전의 엄청난 소리를 우리의 청력으로는 들을 수 없으며, 작은 박테리아를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듯이 제한된 능력을 가진 인간이 그 분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의 물레방아를 쉬임없이 돌리십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혹은 목양을 하면서 하나님이 멈추어 계신 듯 하여 이해되지 않습니까? 일평생 기도하며 목양을 함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열매가 맺혀지지 않아 낙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물레방아는 요셉이 감옥 안에서 전혀 느끼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바로가 꿈을 꾸게 함으로써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감옥 안에 있던 요셉이 바로 앞에 서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선하심이 느껴지지 않을 때 그 때에야말로 성령께서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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