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책을 읽던 엄마가 “주인공이 너라면 어떤 
생각으로, 어떤 방법으로 하였겠느냐? 하고 묻는다.
이것이 오늘날 창의성과 다양성 교육이 아닌가 ?

며칠 전 오전에 제천시립도서관을 찾았다. 자주 찾는 곳이지만 갈수록 정겹다. 마치 연인을 만나는 것처럼 설레기도 한다. 변함없이 가방을 들고 열람실을 향해 걸어가노라면 오른쪽 쉼터 그늘막에서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고 왼쪽의 긴 의자들에서도 몇 분들이 자정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나도 그 유혹(?)에 못 이겨 쉼터 그늘 의자에 걸터앉아 이름 모를 나무와 꽃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인사를 나눈다. 

“고마워요, 잘 자라주어서, 바람에 가볍게 춤을 추어주어서 더욱 멋져요”하며 고마움을 표해본다. 

그러다 얼마 후 가방을 들고 일반 열람실에 가려다가 오늘따라 아동열람실에 불현듯 가고 싶었다. 숨을 죽이고 실내화로 갈아 신고 들어가 보니 예쁜 책상 앞에 두 자녀와 엄마가 함께 책을 읽고 있었다. 자녀는 큰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정도, 작은 아이는 2학년 정도처럼 보였다.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는 덩달아 좋아 신이 났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큰아이가 엄마에게 자신이 읽은 책의 내용을 이야기 하고 또 얼마후에는 작은 아이가 자기가 읽은 책의 줄거리를 엄마에게 이야기한다. 엄마는 연신 말하는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여 주신다. 아이들은 자기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는 엄마가 좋은지 웃음꽃이 피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엄마의 질문에 있다. 두 아이의 이름을 번갈아 불러가며 너희들 이야기는 잘 들었는데 그 주인공이 너라면 너는 어떤 생각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하였겠느냐? 하고 묻는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속으로 아! 이것이다. 아이들이 읽는 책의 줄거리도 중요하지만 독자가 자신의 나름대로 다양한 생각과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엄마의 질문 방법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것이 오늘날 창의성과 다양성 교육이 아닌가 말이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참으로 부끄러웠던 기억이 나를 혼자 빙그레 웃게 만드는 것이 있다. 다름이 아니라 1960년대 중반 중학교 시절에 학년 초가 되면 담임선생님이 학생들의 진로상담 카드를 만들기 위해 학생들의 흥미와 적성을 알아보는 조사서에 취미와 특기란이 있었는데 나로서는 마땅히 다른 사람들보다 잘하는 것도 없고 해서 이 두 란에 ‘독서’라고 쓴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일찍이 칸트는 에밀 이라는 책을 읽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자연주의 사상에 크게 감동하여 학문의 방향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라는 책을 읽고 언어학을 포기하고 새로운 학문의 뜻을 세웠다고 한다. 어디 이뿐이랴 베니스 상인 , 햄릿  등 불후의 명작을 남긴 영국의 셰익스피어는 중학교 2학년 중퇴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는 소년 시절의 수많은 책을 읽어 그의 전기에 의하면 그 시절에 읽은 책의 제목만 적어도 한 권의 책을 만들 정도라고 했으니 무릇 어느 날 갑자기 위대한 문학가가 된 것이 아님을 엿볼 수 있었다.

그렇다. 옛말에 이르기를 “사대부가 사흘 동안 책을 읽지 않으면 스스로 떠올리는 말이 없고 말에 흥미가 없고 거울에 비치는 자기의 얼굴을 보기가 또한 가증하다”라고 한 송대의 시인 황산곡의 말이 불현듯 생각이 난다. 그런데 조금의 아쉬움은 쉼의 공간에서 책 읽는 모습을 그리 쉽게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현재의 이기인 전자매체를 통해서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겠지만 글자기록의 거장인 책의 가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독서는 계절과 취미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삶의 질을 높이는 윤활유로서뿐만 아니라 현대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무기임을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 봄이 어떤가 말이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