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에 이르는
도리를 담대히 선언하는 성결의 복음은, 
좌절과 분노로 점철된 개인들을
회복하는 예언자적 일성이다

조내연 목사
(명지대 교목 · 수정교회 교육목사)

BTS의 제작자 방시혁은 자신의 원동력은 분노라고 했다. 부조리한 현실에 단지 순응할 것만이 아니라, 이에 저항하고 개선하는 자세가, 자기개발과 성장, 발전의 동기가 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는 자신의 감정을 건강한 방향으로 전환시킨 사례일 것이다.

합리적 개인의 시대이다. 자본과 소유가 행복의 척도이고, 자기 자신이 삶의 결정권자인 시대이다. 종교는 개인의 삶의 배경과 이야기의 한 몫을 차지하지도 못하는 시대가 왔다. 신을 모르는, 신이 없어도 되는 시대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무지몽매한 대중들에게 나약함과 두려움을 설교하는 그런 신은 필요 없다고. 누군가는 말한다. 이타심보다 이기심이 덕이 되어야 한다고. 누군가는 말한다. 교육과 계몽은, 필히 개인과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낸다고. 누군가는 말한다. 욕망과 정념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스토아적 부동자세가 현대인들에게 필요하다고.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잘 교육받은, 합리적인 개인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분노가 땅을 뒤덮고, 고통의 신음이 하늘을 찌르는 것은 무엇인가. 살인과 폭행, 중독 등이 연쇄적으로 스며드는 이유가 무엇인가. 

분명, 평범의 좌절 때문이리라. 각자가 정의하고 추구하는 평범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손에 닿을듯 말듯한 그 평범이 현실화되지 못하고, 어떤 억압된 욕망으로 잔존할 때, 사람들은 하와가 되고, 가인이 되고, 에서가 된다. 불현듯 죄가 틈타고, 사망이 지배한다. 어느새 사회는 분노로 뒤덮인다.

분노는 상처를 동반한다. 상처를 주고 받는다. 누군가는 가해자가 되고, 누군가는 피해자가 된다. 세속적이든 거룩하든, 분노는 매 한가지다. 주님의 거룩한 분노를 대언하던, 고대 이스라엘-유다 예언자들도 그런 심리적 딜레마와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또한, 분노를 느끼지 않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건강하게 표현하고, 거룩하게 승화할 것인가가 숙제이다. 종려주일 다음 날, 예수님의 성전 장마당을 뒤엎으셨던 거룩한 분노를 기억한다. 하지만, 그 분노는 결국 만인을 위한 치유와 용서, 화해와 구원을 향한 것이었다. 스스로 상처입은 치유자 되심으로.

실낱 같은 회복의 희망이 없었다면, 예언자들은 매일 발신되는 심판과 저주의 발언들에 삼켜져, 괴물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목할 것은, 그들의 희망은 자기를 향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예언자적 상상력이 오늘의 시대에 요청된다.

성결은, 그러한 예언자적 상상력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땅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에 이르는 도리를 담대히 선언하는 성결의 복음은, 좌절과 분노로 점철된 개인들을 회복하는 예언자적 일성이다. 더 나아가, 이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임한, 선포된 하나님나라를 사랑으로 세워나가는 사명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성결인들과 성결교회의 궁극적 목적과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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