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

故 최건호 목사
故 최건호 목사

여송(餘松) 최건호 목사! 그는 뛰어난 성결의 복음을 부르짖은 목회자로서 교회를 건강하게 성장시켰다. 그는 안목 있는 목회자였다. 서울이 아직 개발의 방향을 잡지 못했을 때, 도심 충무로를 떠나 미지의 땅 강남의 대치동에 터전을 잡았다. 그 탁월한 결단으로 충무교회가 굴지의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개혁 의지와 거룩한 분노가 강했다. 70년대 장 감 성의 젊은 목회자들을 모아 한국교회 이대로는 안 된다는 기치를 내걸고 ‘신풍운동’의 새바람을 일으켰다. 당시 이 운동의 주역들은 각 교단의 중심인물이 되어 한국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에도 교단의 벽을 넘나들며 교류와 폭을 넓혀 일치 운동에 앞장섰다. 그 결과 성결교단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의 지성과 영성을 갖춘 지도력, 학구적 열정과 폭넓은 강단 메시지는 목회자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성결교단 총회장을 비롯해 많은 일에 관여하여 교단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문필가로서 웨슬레안 목회강단(설교집), 신문, 잡지 등 언론을 통해 널리 복음을 전했다. 연합운동에 참여하여 한국교회의 일치와 화합에 공헌했다. 

CBS기독교방송의 노사 갈등 반목의 시기에 관리사장을 맡아 짧은 기간에 안정적 기반을 세우는 등 탁월한 행정가였다. 대통령과 공직자를 위한 국가조찬기도회 등 그의 메시지는 명설교로 꼽혔다. 최 목사는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모범적으로 수행한 건강한 목회자였다. 

최 목사는 1936년 8월 20일 서울시 종로구 필운동에서 부친 최규석과 모친 이한숙의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1945년 12월 20일 대전중앙성결교회에 입교하여 1954년 12월 25일 임영재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고등학생 시절 부여성결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그는 법학으로 성공하겠다는 희망을 품고 열심히 공부하던 중, 집안 사정으로 법학의 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위기가 닥쳤다. 미래의 꿈이 사라지자, 삶의 의미도 잃을 수 있다는 허탈감에서 벗어나고자 그가 몸담은 교회당으로 갔다. 매일 새벽기도회 종치기 봉사를 자원했고 기도에 집중하여 진로를 열어달라고 간구했다. 한 해가 넘도록 계속된 새벽기도의 결과 전혀 예상치도 못한 신학의 길이 열리자 두려움이 앞섰다. 부모 형제들이 이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담임목사와 함께 기도했던 친구들과 교회학교 교사들 모두가 목사로 헌신하도록 적극적으로 권유하고 격려하는 것이었다. 

결단을 내리지 못해 갈등과 고민으로 새벽기도에 더욱 집중하던 그의 심령에 한줄기 밝은 빛이 비쳐 왔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받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말씀을 주신 것이다. 그는 소명의 확신으로 무릎 꿇고 헌신을 결단했다. 

최 목사는 1956년 서울신학대학 입학 후 소명감이 다시 강렬하게 점화된다. 신학교의 기숙사 생활은 군대 훈련소처럼 엄격했다. 새벽 4시 30분 기상 엄수, 이명직 목사 인도의 새벽기도회, 남녀관계의 규율 … 군대처럼 엄격했다. 학기마다 신앙부흥회가 진행되었다. 그 열기가 강렬하여 회개와 참회의 눈물 기도, 열정적인 찬송으로 인해 열정과 감격으로 소명감이 다시 뜨겁게 타올랐고 소명을 재확인하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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