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과 동시에 부임?! 
성공기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평범한 목사의 소소한 이야기다. 2002년 캐내다 밴쿠버로 이민 왔다. 교단 교회를 찾지 못해 예성에서 2015년 여름까지 13년간 부사역자로 섬겼다. 3년째 되던 해 사무총회에서 후임자로 지목되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사임했다. 담임 목사님은 분립 개척이라도 하라고 권하셨지만 솔직히 용기가 없었다. 제자라는 청년들 중에서 아무도 따라오지 않을까 겁도 났다. 

그러다 두 평신도 선교사의 그늘(파송교회)이라도 되어 주려고 개척했다. 거리의 가로등이 촘촘하고 너무 밝다고 불평하진 않듯, 건강한 교회라면 하나 더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무리 없이 작게 시작하려니 건물보다 사람 준비부터 했다. 마침 담임 목사님께서 십일조를 하는 청년 3명을 붙여 주셔서 개척했다. 연어가 출생지로 되돌아가듯 교단을 찾았다. 지방회장이셨던 이근택 목사님(예닮교회의 선임)은 첫 만남에서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후임자를 위해 기도하셨는데 나를 만난 것이다. 나에게 교회를 맡기시고 목사가 없는 선교지로 떠나셨다. 3년 후 돌아오셔서 후임 목회를 돕고 계신다. 첫 담임목회를 잘 하려고 만난 분들이 가정교회를 소개했다. 가정교회라고? 

가정집 교회(?)를 하다
‘연꽃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물만 품는다.’ 나도 열정적이고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는 그릇이고 싶다. 하지만 나는 스타목사가 아니다. 그래서 도슨 트로트맨의 말처럼 “빛이 비추는 곳 까지만” 간다. 최영기 목사님의 ‘가정교회’를 모델로 첫 걸음을 떼었다.

 부임 후 ‘오픈빨’이 있었다. 물론 실속은 없었다. 건물과 간판을 보고 들어온 사람들은 믿는 분들이다. 오고간 흔적 뒤에 남는 건 식사 대접과 호구조사로 쓴 시간과 돈이다. 성도들도 전도랍시고 멀쩡하게 다른 교회 성도들을 꾀어 왔으니 그런 배신자들(?)은 소비주의에 쉽게 빠졌다. 수평이동 신자들은 영적 에너지 소비등급이 높다. 

마트 앞에서 신실하게 전도하는 개척교회 목사에게 어떤 권사님이 다가와 “어느 교회 다니세요? 우리 교회로 오세요.”라고 역전도(?) 했다는 웃푼 일들도 일어난다. 간판보고 오는 사람들을 자연스레 줄일 방법은 간판을 없애는 것이었다. 무료로 지하를 빌려주시겠다는 집사님의 권유를 받아들여 40여명이 모일 수 있는 가정집 지하로 예배처소를 옮겼다. 가정‘집’ 교회다. 기존에 지출하던 교회 랜트비는 전액 선교비로 돌렸다. 랜트비가 없어서 이사했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다. 그 덕에 현재 일곱 분의 선교사님을 후원할 수 있다. 

팬데믹을 통해 성숙하다
목회는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약간의 부흥으로 가정집 지하가 좁아졌다. 무료로 대여해 주신 두 집사님도 조금씩 불편해하는 눈치다. 그 무렵 카페를 오픈했던 목자님이 주일 예배를 카페에서 드리자고 제안했다. 숫자와 헌금도 늘어나서 교회 건물을 랜트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선교비를 줄이지 않으려면 카페가 답이었다. 90여 명이 모일 수 있고 훨씬 쾌적했다. 예배 외에는 사택이나 목자님들의 집에서 모이니 괜찮은 선택이다. 예배당을 옮기고 2달, 팬데믹이 터졌다. 가정집은 6인, 예배당은 10인 이상 대면 모임이 금지되었다. 카페는 ‘신의 한수’였다. 비즈니스라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면 자유였다. 자칫 선교비를 줄이면서까지 랜트비만 낼 뻔 했다. 좀 버티자며 가정집 지하에 남았다면 더 최악이었을 것이다. 이쯤 되니 주님께서 팬데믹을 대비시킨 것이 분명하다. 온라인 성경공부를 통해 적지 않은 인원들이 구원받았다. 중국인 모녀, 베트남 유학생, 백인 여성, 심지어 한국에서까지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다. 세례를 받은 영어권을 위해 매월 마지막 주 동시통역 설교도 진행했다. 하지만 모국어로 예배하는 것이 신앙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세례 이후에 자국어를 사용하는 교회로 연결시켜주었다. 영어권 사역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플로팅성도(가나안성도)를 만들지 않으려고 소그룹 목장모임을 강화했다. 30-40대가 많은 우리 교회는 탈교회적으로 온라인을 선호한다. 한 목장이 한국의 유명교회 온라인 유투브를 시청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목장 나눔에서 대면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는 교회와 목회자들을 비난한다는 소리도 들렸다. 그대로 두면 신앙의 본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다른 교회 온라인을 시청하고, 예닮 공동체의 이름으로 목장에 모여, 기독교 가치를 폄하하는 기현상을 방관할 수는 없었다. 결과는 그 목장의 공중분해였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못 분별했나?’ 고민할 즈음에 하나님은 아픈 위로를 주셨다. 헌신적인 젊은 여 집사 한 분이 오랜 기도 끝에 임신을 했다. 그런데 1달이 조금 넘어 하혈를 하더니 한쪽 나팔관 제거 수술을 받았다. 태아가 자궁 밖에 착상되어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 왜요?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헌신하는 사람에게 복은 못 주실망정 고통을 허락하시면 무서워서 누가 헌신해요?’ 집사님을 심방하며 위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았다. ‘자궁 밖에 태아가 착상하면 산모와 태아 모두의 생명을 위협하듯 교회 밖의 공동체는 자신도 교회도 위험하다.’ 사랑하는 집사님의 고통은 내 마음을 찢어놓았지만, 목장에 대한 결정은 옳았음에 위로를 받았다. 고통을 낭비하지 않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감사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아픈 위로다. 다행이 목회 수기 장려상을 수상하던 날 임신 4주차라는 연락을 받았다. 할렐루야! 아가야 건강하게 태어나렴!


원주민 지교회를 세우다
17년째 원주민 선교를 병행중이다. 선교는 교회의 존재 목적임에도 왜 담임목사가 원주민 선교를 겸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원주민 선교를 한 지 3년쯤 지났을까? 부사역자로 1주일의 선교가 끝나면 휴가도 물질적 여유도 없다. 열정적으로 사역한 만큼 매너리즘이 빨리 왔다. ‘이번 선교가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으로 마지막 폐회예배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원주민 추장 사모님(Vivian)이 외쳤다. “Caleb, Don’t give up my people! Never forget my children!”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인의 외침 같았다. 그 외침이 아직도 메마른 가시덤불 같은 내 심장을 태운다. 

원주민 학교의 정규 체육 시간을 배정받아 120명의 원주민 학생 캠프를 진행하고 있다. 2021년 여름 화재로 리튼 다운타운이 소실되자 우리를 ‘좋은 친구’로 여기던 원주민들이 이제는 ‘식구’라고 스스럼없이 불러준다. 화재로 모든 교회가 사라져 현지에 ‘지교회’를 세웠다. 매월 첫째 주 주일 저녁 5시에 원주민 마을 회관을 빌려 예배를 드린다. 5-15명 들쑥날쑥 참여하지만 왕복 6시간이 아깝지 않다. 찬양팀과 동료 목회자들의 헌신이 고마울 따름이다. 예배 후 무심결에 “Goodb ye!”라고 하면 “Don’t say goodbye, say see you later!”라고 소리친다. 헤어짐의 아쉬움보다 다시 만날 기대감으로 3주를 버텨내는 것이다. 


여전히 배운다
신학생 시절 은사님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따스해진다. 미성대 Ph. D.과정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학업을 통해 목회하며 생겨난 심장의 찌든 기름기를 제거한다. 결코 녹록지 않는 삶을 사시는 귀한 분들이 이 나이 되도록 주특기 하나 없는 한심한 나와 함께한다. 불경기에 카페를 좋은 값에 팔수도 있지만 예배당이라 생각해서 팔지 않는다. 개척 초기 하나님 안에서 성숙된 신앙 인격을 갖춘 만큼 교회가 부흥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만의 바벨탑이었다. 

지금은 내가 성숙한 만큼 성도들이 행복할 것을 믿는다. 우리 목자님들은 내가 노트북과 태블릿, 책이 필요하다 생각하면 십시일반 돈을 모아 구매해서 깜짝 선물로 주신다. 성도님들이 나 때문에 교회 다닐 맛이 난다고 해야 할 텐데, 나는 목자님들 때문에 목회를 할 용기가 난다. 

이런 복된 성도들과 좌충우돌하며 오늘도 즐겁게 예수님의 길을 걷는다. 하나님과 성도님들이 바라 볼 때 안심이 되는 목사이고 싶다.미주 목회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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