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평리 지하차도 관리를 소홀히 여긴 해당 경찰공무원들의 꼴. 직무유기에 거짓 허위보고까지 서슴지 않는 도덕 불감증. 안전불감증. 자기 관리지역이 아니라고 외면 방관하는 지방자치 행정공무원들의 꼴. 이제와서 신생아 살인이 저출산 요인인 것처럼 과도 과다 수사하는 꼴. 눈만 뜨면 일어나는 파렴치한 범죄 사각지대의 꼴. 이런 꼴, 저런 꼴에 반성은커녕 큰소리부터 치고 보는 국회의원들의 꼴. 이런 꼬락서니에 지쳐서 한쪽 가슴이 무너져 가는 백성들.

한쪽에서는 천연자원 하나 없는 대한민국 살려 보려고 부득부득 기를 쓰고, 다른 한쪽에서는 중국에 먹히길 바라는 듯. 조선시대부터 중국과 일본과 우리나라와의 지배 기간 비율이 503 : 36이다.


우리에게는 일본보다 중국이 훨씬 더 큰 원수다. 일본은 부스러기라도 남겼지만, 중국은 가져만 갔다. 일본에 위안부가 있다면 중국은 50만에 이르는 ‘환향녀’가 있다! 환향녀 뿐인가? 걸핏하면 우리의 처녀들을 공물로 데려가지 않았는가. 중국은 사실상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서 부터 1895년 시모노세끼 조약때까지 503년 간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지배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을 존경하고, 반일을 내세우면서 중국이 우리에게 준 막대한 피해는 묻히고 잊혔다. 


대한민국의 앞날은?
교권이 땅에 떨어지게 만든 건 교사들도 한 몫을 한 것이 아닐까? 교원도 노동자라고 외친 교원노조들. 필자도 대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다가 정년 퇴임했다. 교권은 노동자로의 권익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도가 없는 교육 현실을 한탄해야 한다. 도(道)가 지식이라면 예(禮)는 그 도를 담는 그릇이다. 도는 천상을 달리는데 예는 금이 가서 땅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는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의 형편이다. 금이 간 그릇은 개밥그릇으로밖에 쓸 수 없다. 

교사는 스승이지 노동자가 아니다. 목사들이 노조를 만든다면 지나가는 개들이 웃을 것이다. 가르치는 교(敎)에 노동을 가미하지 말고 스승(師)의 의미에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목사도 ‘목(牧)’에 의미를 두면 교역이 아니라 고역(苦役)으로 전락한다. ‘사(師)’는 감히 고개 쳐들고 대해서는 안 될 ‘군사부일체’임을 알 때 사람이 되고 질서가 서고 나라 꼴이 된다.

학생의 인권을 위한답시고 제정된 휴식권은 수업 휴식권인가 의문스럽다. 여기서부터 교권이 무너져 버렸다. 학부모는 교사에게 윽박지르며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 줄 아느냐?”고 한다. 소가 웃을 일이 아닌가? 이래 놓고 내 자식 사람 만들라고 학교에 맡긴단 말인가? 집에서 교육해야 할 것 아닌가? 꼴이 꼴이 아니다. 나라 꼴, 학교 꼴 잘 돌아간다.

식구들 먹여 살리려 바깥일에 뼈가 무르도록 들판에서 비 오듯 비지땀을 흘려가며 일하고 허둥지둥 집에 돌아와 보니 고부간에 쌈질로 집안 분위기가 냉랭한 것이 못마땅해서 가장이 내뱉은 말 “집안 꼴 잘 돌아간다”였다.

서로 네 탓이라고 입방아만 떨고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 탓에, 고물가에 저임금으로 지쳐가는 국민들이다. 정치인은 있는데 정치는 없고, 패거리, 떼거리 정치만 난무하고, 지식인은 많은데 지도자는 없고, 지도자로 자처하는 자는 많은데 지혜자는 없다.

어느 가수의 “아~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비탄조의 노랫말이 가슴에 와닿는 이유는 왜일까? 국민들은 “이게 나라냐”며 전 정권 집권 내내 수없이 투정해 왔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게 교회냐?” “교단이 왜 이래” “총회가 왜 이래”하며 비조 섞인 말이 나오게 된 이유가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을까? 끼리끼리 우리들끼리의 파당 파벌은 예수 정신이 아니다. 사탄의 농락이자 놀음일 뿐이다.

보편적인 교회는 교권보다 코람데오가 편만할 때 교회의 표지가 세워진다. 교회 대표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을 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성례가 바르게 집행될 때이다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라는 개혁교회의 명제는 언제나 성직자들을 향한 칼날이 되어야 한다. 러시아의 포격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200년된 축일성당이 파괴됐다. 해당 성당은 1809년에 지어진 정교회 성당이며, 소련 시절 파손됐다가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재건됐다고 한다. 
신도들은 구멍이 뻥 뚫린 성당 앞에서 미사를 드렸다. 

추구하던 가치가 무너졌을 때 우리는 재건을 꿈꾼다. 죽은 나무는 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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