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문제는 우리가 우리 안을 비운 뒤,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이다.

요즘 미디어에 투영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암울하다. 좀체 사라지지 않는 후진적 재난 사고와 반복되는 혐오성 폭력, 또 여전한 권력형 비리까지. 이제는 개선될 때도 되지 않았나 생각하다가도 뒤돌아보면 해결해야 할 적잖은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것을 보게 된다. 

왜 이런 문제가 반복되고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이 모든 문제의 뿌리가 사람의 욕망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남보다 더 많이 갖고 싶고, 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고, 그래서 남보다 더 높게 평가받고자 하는 우리의 못난 욕망이 이 모든 문제의 시작은 아닐까.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규모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욕망 없는 이가 또 어디 있을까. 우린 각자의 욕망과 꿈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누구나 욕망 없이 살고 있지 않다면, 문제는 그것에 매여있는가 혹은 아닌가 일 것이다. 

욕망에 매여있는 이들은 우리 존재를 그것으로 채운 경우이다. 우리 안을 욕망으로 가득 채우면 이웃의 사정을 헤아리기 어렵고, 남의 아픔 챙기기가 번거롭게 될 것이다. 결국 문제는 우리가 우리 안을 비운 뒤,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이다. 

성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비움’(케노시스)을 교훈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5-7) 예수께서 자신을 비워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가 실현되는 도구로 삼으신 것을 우리는 케노시스의 표본으로 삼는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비움’을 강조하고, 또 그것의 준행을 강조한다. 

그렇게 우리는 케노시스의 가르침을 비움으로만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의 것’을 비우는 것이다. 나의 욕망을 비우는 것이고, 나의 소유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빈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이다. 빌립보서의 말씀도 다시 채워 넣음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한 몸이시나 자신을 비워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선 자신을 비워 그 안을 사람들과 같이 되고자 하는 사랑으로 채우셨다. 그래서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길을 택하셨다. 

계속해서 빌립보서는 그렇게 비움과 채움의 연속을 따라, 우리를 비우고 그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채울 것을 교훈하고 있다. 예수의 마음은 사람들, 즉 이웃이라 불릴 수 있는 ‘남과 같이 되는 길’이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 주변의 많은 문제. 무엇이 문제일까? 사람들은 그 안에 무엇을 비우고 채워서 이토록 복잡하고 곤란한 문제를 만들어 낼까?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제대로 비우지도, 또 올바로 채우지도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선 우리는 나를 버려야 한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은 나의 것을 채우고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를 나로 채우고, 내 것에만 집착한다면, 우리 사는 세상은 다툼과 절망뿐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내 안에 하나님의 뜻을 가득 담아낸다면, 세상은 충분히 살만한 곳이 될 것이다. 

세상이 어지럽다. 흉흉한 소식이 끊기지 않는다. 그럼 우리를 되돌아보자. 우리 신앙인이, 그리고 교회가 제대로 비우고 채우고 있는가를! 우리의 비움과 채움이 충분히 교훈이 되고 세상 사람들에게 모범이 된다면, 충분히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운영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 그리고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제대로 (나의 욕망을) 비우고, 올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채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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