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임직과 새 교회당 건축
마침내 주환은 1976년 5월 16일 변경순 목사 위임식과 제3대 주환 장로 장립식을 지방회의 임원과 많은 목사 장로들을 하객으로 모시고 거행했다. 개척자 변경순 목사가 1977년 은퇴하고 제2대 강선영 목사가 부임하여 흑벽돌교회를 헐고 건축할 때 그는 가장 힘든 건축 재무를 맡아 고생했다. 교회의 외벽을 흰 타일로 장식하자, 사람들은 ‘언덕 위 하얀교회’라고 불렀다.

교회의 모든 경비를 인건비 외 동결하고 교회 건축에 투입하고 전력을 다한 지 7개월 만에 큰 공사를 마쳤다. 그리고 마지막 주문한 장의자들이 들어와 배치가 끝나자, 갑자기 그가 너무 감격하여 강 목사를 붙잡고 흐느껴 울었다. 두 분은 교회 건축 시작부터 날마다 현장에 나와 지휘하고 자금을 계속 대느라 무척 고생했기에 누구보다 감격이 컸다.

그 후 주환 장로는 교회 대표로 지방회의 교회학교연합회장과 지방회 장로 부회장을 역임하여 지방회 발전에 공헌했다. 그리고 총회적으로는 30여 년간 대의원으로 참석해 청년들 교육에 관심이 많아 총회 청소년위원회의 임원이나 서기로 성청의 발전을 도왔으며, 또한 전국의 미자립교회들을 위해 전도지를 인쇄, 무료로 총회 선교국을 통해 몇 년간 제공하기도 했다. 신우인쇄소-일정사-두루출판사로
그가 오직 믿음으로 사는 장로라고 알려지자 인쇄물이 점점 늘어나 바빠지기 시작했다. 누구의 소개로 석원태 목사를 처음 만났는데 석 목사는 장로교회(고려파)의 총회장이며 고려신학교의 교장으로 서울에서 큰 교회로 알려진 경향장로교회의 담임목사였다.

석 목사님이 자기 교회의 주보를 주면서 견적을 내보라고 했다. 1970년대 당시 주보는 보통 4쪽인데, 경향교회는 8쪽이나 되고 설교문도 실렸으며, 주보 발행 부수가 1,500부였다. 그가 견적서를 작성해서 이튿날 방문했더니, 너무 단가가 싸다며 한 달만 납품하라고 해서 한 달간 납품했더니, 값도 싸고 질도 좋다며 계속 납품하되 시중에 보편적인 단가로 올려서 주보를 납품하자는 조건으로 경향교회 주보 인쇄를 시작하므로 경제적 도움이 되었다.

모든 상거래는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만 그는 교회 일에는 이익보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의식이 있어, 최소의 이윤만을 붙인다. 그래서 석 목사는 주보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인쇄물은 물론 자기 설교집 수십 권을 그를 통해 발간하는 등 40년간 큰 도움을 주신 분이었다.

그는 사명 있는 출판사로 발전해 가기 위해 한국 인쇄소의 집합소인 을지로 3가 빌딩으로 이전했다. 어느 날 그를 도와주던 박영환 목사가 찾아와서 중단한 신학교 공부를 계속해서 목사가 되라고 했다. 그래서 박 목사가 교장으로 있는 용산의 OO장로교신학교 야간부에 3학년으로 편입하여 직장의 일이 끝나면 학교에 가서 수업하고 밤늦게 귀가하는 등 바쁘게 살았다.

그런데 4학년 졸업반 때 평소 존경하던 어느 목사의 인격적으로 실망한 모습에 그는 혹시라도 내 잘못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4학년 중간에 신학의 길을 중단하면서 평신도로 충성하며 살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가 인쇄소를 시작한 지 약 50년 동안 10여 교회의 주보를 실비로 봉사하였다. 그는 주보에 실린 목사님들 설교를 반드시 읽고 은혜받기에 교회 주보하기를 즐거워했다. 그의 출판사를 통해 발간한 책이 400권이 넘고, 90%가 신앙서적으로 문서선교를 한 것이 큰 보람이었다. 

30년 넘게 시무한 서부교회의 임채영 목사는, 그는 목사의 입장을 잘 이해하여 장로와 목회자 간 중재 역할을 잘했다. 그의 최우선은 교회였고,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 앞장서서 문제를 해결했으며, 신자들로부터 신뢰와 존경받았으나 겸손과 섬기는 삶이었다고 증언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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