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밀접한 개념이 있다면 ‘불안’입니다. 떨쳐내고 또 떨쳐내도 또 찾아오고 하는 과정을 수 없이 경험합니다.

알랭드 보통은 <불안>이라고 하는 책에서 현대인의 불안의 원인을 5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그 중에 기대라고 요소가 있는데, 사람들은 은연중에 덜 주고 더 받고자 하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의 갈등이 끊이지 않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은 자신의 며느리이자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종 엘리에셀을 자신의 고향 땅으로 보냅니다. 주인의 명을 받은 엘리에셀은 순적하게 이 여인을 만나게 하여 주실 것과 물을 달라고 청했을 때 그 여인이 엘리에셀 자신에게뿐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마시우게 하는 모습을 응답의 징표로 보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한 여인이 나타나 엘리에셀이 기도한대로 물을 길어 엘리에셀에게 뿐만이 아니라 낙타들에게도 배불리 마시우게 하는게 아니겠습니까! 

이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리브가의 성품을 엿보게 합니다. 사실 여인 혼자의 힘으로 물을 길어서 낙타에게 마시우게 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엘리에셀이 물을 청하였을 때 그녀는 물을 길어 이미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물을 길을 때 “우물로 내려가서(히.테레드) … 올라오는지라(히. 타알 창 24:16)”라고 한 것을 보면 밧줄에 항아리나 가죽 부대를 매달아서 물을 퍼올리는 방식(요 4:11)이 아닌 사람이 물을 긷기 위해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커다란 물웅덩이와 같은 형태의 우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위 ‘웅덩이’ (히. 보르, 렘 2:13)라고 번역된 이 우물의 형태는 아래로 내려가고 오르고 하는 일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고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낯선이의 물을 마시우게 하여 달라는 요청은 거절당하기 십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엘리에셀에게는 물론이요 낙타에게도 기꺼이 물을 길어 마시우게 했습니다. 

낙타가 물을 배에 저장까지 하는 동물이라는 점과 낙타의 숫자를 감안할 때 작업 시간은 족히 2~3시간 이상은 걸렸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이 일을 ‘급히’(히.테마헤르 창 24:20) 우물로 ‘달려’(히.타라츠 24:20)가서 행함으로써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쳐 보이는 한 여행객을 향한 한 여인의 친절함을 엘리에셀은 ‘묵묵히 주목하였다’(16:21)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그 여인은 처음 만난 이 초라한 여행객을 향해 ‘내 주여’(24:18)라고 호칭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아도나이’를 번역한 이 상대방을 높이는 경어체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칭할 때 주로 사용하지만, 사람에게 사용할 때는 상대방을 매우 존경하고 소중히 여기는 뉘앙스가 담겨져 있습니다. 

옛말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조상들의 지혜와 해학을 느끼게 하는 속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소위 황금률(Golden Rule)이라고 일컬어 지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입니다. 

성경을 설교하고 통으로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선지자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요? 대우 받고 존경 받고 인정받고자 하는 기대와는 결이 다른 삶을 살도록 교훈하셨습니다. 

그것은 ‘먼저 남을 대접하는 삶’입니다. 세상은 받는 대로 줍니다. 아니 덜 주고 더 받는 것을 처세술이랍시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도저히 깨닫을 수 없는 황금 원리를 주셨는데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먼저 대접하라”입니다. 이는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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