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장로회 파송 7명의 숨결 그대로

국내최초 한센병 치료한 예수병원
전킨-마티 등 선교사-가족들 묘역도
신흥학교는 전주 항일운동 근거지
남문교회 결사대 14명은 3.1운동 서막

제물포 거쳐 도착한 군산
전킨 선교사는 아들 셋 모두 잃어

호남 복음의 시초 ‘7인의 선발대’
전라북도는 전국 복음화율 1위(2015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기준)를 차지한 복음의 땅이다. 이곳에 복음이 전해지고 든든히 뿌리내리게 된 것은 바다 건너에서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곳을 찾아온 푸른 눈의 선교사들 때문이다. 테이트, 레이놀즈, 전킨, 그리고 마티, 볼링, 레이번, 데이비스 등 ‘7인의 선발대’로 불리는 이 선교사들이 전라북도 성지순례 이야기의 시작이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가 파송해 1894년 한국에 도착한 7명의 선교사는 삼각선교 원칙에 따라 복음을 전했다.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웠고 자신과 가족을 희생하기까지 조선을 사랑했다.

조선인보다 조선을 더 사랑했던 이들 선교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전라북도 전주와 군산으로 떠나보자.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걷다 보면, 이 지역을 전라‘복’도라 부르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복음 하면 전주, ‘바이블 벨트’ 
‘전주하면 비빔밥과 초코파이’만 떠오른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도 빼놓을 수 없어 비빔밥 한 그릇 비벼 먹고 출발하면 순례길 반나절이 든든하다. 

작년 말 문을 연 전주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에서 출발했다. 예수병원 바로 맞은편에 세워진 이 기념관 뒤편 오르막의 선교사묘역에 올랐다가 건너편 예수병원을 조망해 볼 수 있다. 이어 전주신흥학교, 기전학교를 둘러본 후 다가교를 건너서 전주서문교회까지 갈 수 있는데, 거기서 전주천을 따라 천변길로 걸으면 전주 남문교회까지 약 2km 부담스럽지 않은 도보여행이 완성된다. 이후에는 익숙한 전주 한옥마을을 산책해도 좋다.

전주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 국비 80억 원과 예수병원 예산 20억 원을 투입해 지은 총 100억 원 규모의  세련된 건물 안에 호남지역 교회사의 기원인 전주의 기독교 역사를 집대성해 두었다. 7인의 선교사가 조선에 오게 된 배경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전주 기독교인의 활약상이 전시돼 있다. 

2층 전시관을 터널처럼 어두운 골목으로 연출한 것이 인상적이다. 임지훈 학예연구원은 “선교사들이 시작한 호남 복음 전파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빛을 향해 이어진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면서 선교사들이 서울도 부산도 아닌 전주까지 들어온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 당시의 한국선교 지도가 그려진 쪽으로 일행을 인도했다. 이유는 교세 경쟁. 미국은 남장로교, 북장로교, 침례교 등 수많은 교파로 갈라져 조선 각지에 선교사를 파송했지만, 호남은 아직 미지의 세계였던 것이다. 오늘날 이리저리 갈라져 경쟁도 하고 가끔 화합도 하는 한국 기독교의 현실과 문득 겹치는 순간이다.

레이놀즈 선교사를 주축으로 대중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 성경 번역도 이뤄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국한문 신약전서와 구약전서 초판본 상·하권 등을 이곳에서 직접 볼 수 있다.

예수병원 기념관 3층 의학박물관에서 올해로 125주년을 맞은 예수병원의 역사를 훑어본다. 
1898년 의사인 마티 잉골드 선교사가 어린이 및 부인 환자 외래진료소를 개원함으로 시작된 예수병원 역사에는 유난히 ‘최초’가 많다. 국내 최초로 한센병을 치료했고, 암 환자 심부 치료, 수련의제도 등을 처음 시작했다. 마티의 일기에는 가난한 조선의 환자들을 만난 여러 일화가 담겨있다.

마티 잉골드의 왕진가방, 당시 사용하던 방광 내시경, 요도확장기, 안과수술 도구, 종양심부치료기록지 등 2009년 문화재청 근대문화유산 의료분야 목록에 등재된 유물들이 커다란 유리관 안에 설명 없이 들어있다. 설명이 없으니 천천히 자세히 살펴보며 머릿속에 상상이 펼쳐진다. 예수병원 수장고에만 보관 해두었던 다양한 유물을 관람객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개방형 수장고’다. 수장고 케이스 중앙의 QR코드를 핸드폰으로 비추면 설명을 볼 수 있다.

전주선교사묘역 건물 뒤편으로 나와 선교사묘역에 오른다. 윌리엄 전킨 선교사 등 선교사와 가족들이 묻힌 묘비가 모여 있다. 
유난히 먹먹해지는건 어린 아이들의 묘 때문이다. 의사였던 마티 잉골드는 예수병원을 세워 수많은 생명을 구했지만, 자신의 딸은 구하지 못했다. 

군산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전킨 선교사도 세 아들을 묻어야 했다. 풍토병에 아이들이 먼저 희생된 것이다. 그런데도 전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며 “선교사의 삶은 사랑이 넘치는 삶이며 행복이 넘치는 삶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지난주 쏟아진 집중호우로 수풀이 우거진 언덕배기에 잠시 서 있는 동안에도 독한 산모기가 달려든다. 불평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작디작은 품속 아이를 보내야했던 선교사의 심정이 떠올라 그대로 삼키고 만다. 신흥학교 직접 안내자로 나선 신흥고등학교 김병호 교장은 “우리 학교는 1900년부터 시작돼 120년이 넘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은 유물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라며 학교의 굴곡진 역사를 소개했다.

신흥학교는 미국 남장로교 레이놀즈 선교사가 세웠다. 1919년 3.13 전주만세운동을 주도했고, 광주학생운동 등 일제 강점기 전주 지역 항일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과 신사참배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자진 폐교, 학생들이 모두 떠났다. 광복 후 다시 학교 문을 열었지만,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강당 앞에 육군참모총장 명의로 당시 학생이던 참전 용사들의 명단이 붙어 있다. 또 1980년 5.27 신흥민주화운동으로 독재정권에 저항하고 1982년 큰 화재를 겪기도 했다. 그 와중 구사일생 보존된 강당과 본관 포치가 2005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치열했던 역사를 전하고 있다. 신흥중학교 건물을 배경으로 포치 앞에서 찍는 인생샷이 순례객 사진첩에 아름다운 추억을 남긴다.


서문교회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다니는 곳마다 “거두리로다”라고 찬양하며 전도를 멈추지 않았던 이거두리. 부유했지만 자신의 재산을 모두 가져다 거지들에게 나눠주며 전도했던 인물로, 서문교회 양반 출신 첫 장로다. 그가 죽자, 거지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비를 세웠고 장례 행렬이 끝없이 이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정림건축 고 김정철 선생의 작품인 전주 서문교회는 정적인 전주의 분위기를 예배당에 녹여낸 걸작이다. 입구에는 전킨 기념종이 서 있다. 태평양전쟁때 일본에 군수물자로 빼앗겨 해방 이후 다시 제작한 종이다. 원래의 종은 아름다운 소리가 10리 밖까지 퍼졌다고 한다.

남문교회 전주 남문교회는 1905년 해리슨, 전킨, 매커친 선교사 등과 서문교회 일부 교인들이 처음 전도를 하며 기도회를 하는 장소로 시작되었다. 

이후 최국현 초대장로의 딸 최요안나를 비롯한 기전여고 결사대 14명이 밤을 지새워 3.1운동의 서막을 열었고, 2대 고득순 장로는 독립단체 신간회 활동으로 영생유치원과 보육원, 영어 야학을 설립해 근대교육에 앞장섰다. 유신독재 때 교역자가 투쟁으로 옥살이하고, 군사정권이 사라질 때까지 젊은 대학생과 성도들이 민주화운동에 동참, 숱한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30도가 훌쩍 넘는 날씨였다. 1분 이상 서 있기만 해도 땀에 온몸이 축축해지는 습한 공기에 뙤약볕 아래를 걸어 이동하자니 이 길이 진정 순례길이구나 싶다. 무더위로 걷지 못한 서문교회부터 남문교회까지의 전주천변길, 일명 ‘이거두리길’을 못내 아쉬워하며 전주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군산, ‘수탈의 현장’이 힙한 근대도시로
호남지방에 복음이 들어온 것은 1894년 2월경이다. 미 남장로회 소속으로 파송된 7인의 선발대 중 전킨 선교사의 발자취를 따라 군산으로 이동한다. 전킨 선교사는 군산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교회를 세웠다. 옛 군산세관에서 출발해 전킨 선교사 기념비를 보고, 신흥동 일본식 가옥까지 이어지는 근대화 거리를 가로지른다. 3.1운동 기념관, 경암동철길마을까지 차와 도보가 섞인 코스다.

옛 군산세관 바로 앞에는 전킨과 드루 선교사 군산 첫 도착지가 표시되어 있다. 순례객을 안내한 전킨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 서종표 목사(군산중동교회)는 “조선이 어딘지도 모르고 출발한 7명의 선교사가 1892년 부산을 거쳐 제물포로, 제물포에서 군산으로 왔다”고 설명했다. 여기서부터 군산 순례길을 출발하는 것은 전킨 선교사와 교육자였던 메리 레이번 사모, 의사였던 드루 선교사가 남장로회의 삼위일체 선교 활동을 시작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 같이 1895년 수덕산 중턱에 초가집을 지어 살았다. 전킨은 군산에서 세 아들을 묻었다. 군산신흥교회 주차장에서 200m 위 수덕산 중턱에 오른 서 목사는 “입수한 자료를 연구하여 이곳에 그들이 살던 초가집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초가집 터에서 신흥동 일본식 가옥(구 히로쓰 가옥)까지 순례길이 이어진다. 일제시대에 조성된 이 거리를 직선으로 10분 정도 걸으며 훔친 쌀을 하늘까지 쌓았던 일제의 조선 수탈 현장을 떠올린다. 본국에서 낮은 신분으로 살던 일본인 히로쓰는 군산에서 신분 상승을 꿈꿨다. 으리으리한 집을 짓고 조선인이 피땀으로 거둔 쌀 포대를 일본으로 수탈해 갔기 때문에 늘 목숨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그가 살던 집에 들어가 보니 넓고 잘 꾸며 호화스럽지만, 단조롭고 모든 창을 막아 답답하다. 집안 곳곳에 언제라도 일본으로 도망갈 수 있는 여러 개의 비밀 탈출구를 뚫어뒀다. 부귀영화를 누렸어도 늘 불안하게 살았던 수탈자의 삶이다.

군산 근대화 거리는 ‘힙’하고 ‘핫’하다. 순례길로 걸었지만 요즘 이 길은 군산 근대화 거리로 조성돼 젊은이들의 발길을 끄는 핫한 구역이다. 감각적인 카페와 공방, 7080시대 장난감과 불량식품을 파는 레트로한 문방구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나온 초원사진관 앞에도 사진을 찍으려는 줄이 늘어섰고, 길 위에서 시간여행을 즐기는 여행자들이 순례자들과 스쳐 지나갔다. 
3.1운동 기념관과 경암동철길마을 군산 3.1운동 기념관으로 이동해 영명학교와 예수병원, 구암교회 등이 주축이 되어 만세운동을 일으켰던 역사를 둘러보고, 경암동철길마을을 짧게 걸으며 전북 순례길 여정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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