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길이 우리의 마음과 결심에 부족할 때가 많지만 
우리 나름의 다양한 사랑의 언어로 물러서지 말고 
쉼 없이 주님께 나아가자

김진오 목사(서울강동지방 · 한빛교회)
김진오 목사(서울강동지방 · 한빛교회)

성결 가족에게 소개하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아마도 이런 혐의 속에서 오랜 시간 방치된 좋은 예가 아닐까 생각된다. 


1.사랑과 성숙이 부조화되면 행복이 먼 곳에 있게 된다.(눅 10:38~42)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가정 이야기는 눅 10장, 요 11장에 나온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눅10장이 앞의 사건이고 요11장의 사건이 뒷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집의 구성원 중 마르다는 그가 다른 가족과 상의 없이 즉시 예수님의 일행을 가정으로 모시는 것을 볼 때 비록 여자였지만 의욕적이고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눅 10:38) 

아마도 오랜 시간 이 본문은 교회에서 해석될 때마다 거의 두 여인에 대한 대립적 비교로 해석의 맥락이 흘러간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익숙한 관점은 두 여인 중 한 사람을 골라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결국 마리아는 좋은 여인, 마르다는 나쁘거나 어리석은 여인으로 낙인이 찍히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 깊게 본문을 들여다보면 본문에 등장하는 두 자매는 성향이 몹시 다르고 이들은 자신의 성향에서 최선을 다해 주님을 대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다: 집안일과 의사결정에 주도적이며 따라서 책임감이 강하고 주님을 맛있는 식사로 섬기기를 원하는 ‘사랑의 언어’를 작동시키고 있고 이 판단은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소위 행간 읽기적 관점으로 이야기를 끌어낼수 있다면 고단한 사역의 여정을 염두에 둘 때 참으로 시의적절한 판단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마리아: 주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여인은 자기 언니의 형편과 마음을 조금도 헤아릴 수 없는 절박함이 있었던 것 같다.  후에 요11장에서 이 여인이 하는 행동을 보면  그녀에게 주님을 향한 간절함과 사모함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42) 내 결론은 결국 나쁘거나 어긋난 사람이 없고 따라서 본문을 이해할 때 서로 갈등하거나 대립하며 하나만을 선택하기 위해 고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 약간의 아쉬움을 말한다면 이 본문의 시점만을 가지고 볼 때 두 여인이 서로에게 조금만 더 성숙하고 세심한 태도를 가졌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는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2. 믿음을 위한 주님의 눈물에서 새길로 나아가야 한다.(요 11:1~57)
눅 10:38절의 한 가족 이야기가 요한복음 11장에서 다시 이어진다. 그 유명한 죽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 기사가 나오고 이 기사에는 매우 흔하지 않는 ‘예수님이 우셨다’ 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실제로 성경에 예수님이 우신 사건은 약 3회 정도밖에 찾을 수 없다. 요11장은 온통 눈물과 울음투성이다. 나사로의 가족들, 그들을 위로하는 유대인들, 그리고 예수님의 눈물이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요 11:33)

본문의 ‘비통히 여긴다’는 뜻의 원어 엠브리마오마이(ἐμβριμάομαι)는 원래 ‘숨을 거칠게 내쉬다’는 뜻으로 인간에 적용할 때 대개는 1.슬픔과 2.분노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된다. 본디 이 말은 ‘말이 거칠게 달리면서 숨을 내몰아 쉬는, 또는 화가 나서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담아내는 어휘이다. 이 해석을 근거로 어떤 이들은 믿음이 없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책망하는 울음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내 경우는 아마도 인간의 죽음과 고통에 짓눌려 슬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시고 비통해하신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인격과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는가? 생각된다.

3. 성숙한 믿음이 우리 인생과 신앙을 풍성하게 한다.(요12:1~11)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하여 헌신했지만 성숙이라는 차원에서 다소 부족해 보이는 한 가정 이야기는 요11장에 다시 등장하여 결국 이야기를 매듭짓지 못한 채 12장으로 이어지고 믿음에 대한 교훈을 말하고자 이 스토리에 무려 68절의 본문을 소비한다. 

이야기의 대미, 본문 12장에 등장된 가족들은 이제 더 이상 이전의 가족들이 아니다. 마르다는 여전히 음식을 만들지만 눅10장의 불만과 불편한 기색을 느낄 수 없다.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는 이전의 내용에 그 존재감을 잘 느낄 수 없지만 12장에서는 제자들의 반열에 당당히 참여하고 있다. 마리아는 가장 귀한 향유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깨뜨려 주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아 주님의 죽으심을 준비하는 놀라운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다.

신앙의 길이 우리의 마음과 결심에 부족할 때가 많지만 우리 나름의 다양한 사랑의 언어로 물러서지 말고 쉼 없이 주님께 나아가 우리 모든 성결 가족 마음에도 더 귀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가 풍성히 열리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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