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 목사
(서울강서지방 · 임마누엘교회)

교회를 다니면서 상처를 입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연배가 있으신 장년들과 달리 비교적 교회의 젊은 세대들은 마음의 표현을 가감없이 하는 경우가 있는데 “교회 다니는게 힘들다”며 솔직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 이상한 사람들이 참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변명삼아 해 주는 이야기가 있는데 교회는 ‘영적인 병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원에 가면 이토록 많은 환자들이 있었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듯이 교회는 영적인 병원과 같아서 이상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ㄴ 보면 당연하다고 권면하곤 합니다. 

문제는 육적인 질병은 통증으로 인하여 속히 병을 고치고자 하는 마음이라도 있는 반면, 영적인 질병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병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도 않고 고치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적 신앙생활이 건전하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대인관계의 건전성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언급하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수군수군’, ‘비방’, ‘분쟁’등과 같은 죄들을 보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치유되지 못한 내면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나쁜 열매들로써 대인관계에서 남을 괴롭히고 힘들게 합니다. 목양의 시간을 보낼수록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기도 생활’과 ‘예배 생활’은 신앙인에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믿음의 증거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착각하게 하고 속이는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가 될 수 있습니다만 스데반 집사를 죽인 이들은 다른 이가 아닌 종교적으로 열심이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데반 집사를 거짓말로 모함하여 그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교회에서 상처 주는 대상도 어쩌다가 한 번씩 교회 오는 성도들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상처는 소위 믿음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로부터 받습니다. 교회가 힘들어지는 경우도 대부분 이러한 류의 사람들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건전성은 대인관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의기소침해지고, 교회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 사람은 경계해야 할 대상입니다. 

믿음이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사치스러운 믿음 아닌 믿음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단순히 예수님이 살아계셨고, 갈보리에서 돌아가셨으며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아마 귀신들도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될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약 2:19) 심지어 ‘떨기까지’ 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반대말은 ‘안 믿는다’가 아니라 ‘순종하지 않다’ ‘관계가 깨어지다’가 되어야 합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성도들로 하여금 순종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일입니다. 뱀이 하와에게 다가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히. 콜 에츠 하겐)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라고 물으며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 (2:16, 히.콜 에츠 하겐)를 먹으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모든 좋은 것을 손대지 못하게 하는 속성을 가진 분으로 왜곡하는 분위기를 자아냈던 것입니다. 기도를 하는 목적과 예배 드림은 궁극적인 관계성의 회복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누군가가 실족하여 넘어질 때 나와 5분 만이라도 대화를 나누었을 때 용기가 생기고 살 소망이 생겨나고 비방과 수군거림이 사라지고 진정한 복음의 사람으로 바뀌어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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