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기독교인들은 믿음 소망 사랑의 
관점에서 살아야 행복하고 감사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어떤 사고를 하고 어떤 관점을 갖느냐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기독교인에게 신앙적 사고나 관점은 믿음과 직결되기 때문에 더더욱 중요하다.

이를테면 골리앗을 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가 너무 커서 이길 수 없다고 말하겠지만, 믿음의 사람은 골리앗은 너무 커서 맞추기 쉽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분별하는 데 자신들이 하나님과 동일해질 수 있다는 관점을 갖고 선악과를 따 먹었다. 그러나 열왕기상 3장에서 솔로몬은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가 하나님께 있다는 관점을 갖고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구하며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요구하였다. 같은 사물이나 현상을 놓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먹느냐는 ‘사고’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그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 또는 처지를 말하는 것은 ‘관점’의 문제이다. 이처럼 선악에 대한 아담과 하와 그리고 솔로몬의 사고나 관점 차이는 성경적으로만 볼 때 인류 최초 타락의 원죄인으로서 힘든 노동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맞는 결과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지혜의 왕으로 부귀영화까지 누리는 상반된 결과를 가져왔다.

“긍정은 긍정을 낳고 부정은 부정을 낳는다”는 말이 있다. 다시 말해서 긍정적인 사고나 관점을 가진 사람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만, 부정적인 사고나 관점을 가진 사람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사람마다 사고와 관점이 다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고르기아스(Gorgias)는 “내가 누군가에게 내가 아는 사실을 정확히 전달한다고 해도 그 상대방이 그걸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는 다소 지나친 주장이기는 하나 다른 사람의 관점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함께 생각할 때 더 좋은 관점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반면에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그 비슷한 생각을 나누다 보면 점점 더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관점에 이를 수도 있다. 즉 집단 사고의 함정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법과 원칙도 사람들의 사고나 관점에 따라 법리를 달리 이해하고 해석하기도 한다. 법과 원칙을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로 받아들이면 법과 원칙에 의해 갈등이 조정되고 집행되지만, 법과 원칙을 수사로 애용하며 권력의 기반으로 활용하면 강자의 유일한 도구로 변한다. 이처럼 관점은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나와 다른 견해에 대해 틀린 일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또한 관점에 따라 그 결과의 성패도 극명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성찰하면서 자신의 관점을 함부로 남발해서도 안 된다. 특히 기독교 신앙인들은 자신이나 집단이기주의적인 사고나 관점에 함몰되어 교회 안팎의 안정을 해치고 갈등을 조장하는 일에 몰두하여서는 안 된다. 다양한 관점에 대해 상대방을 알아가고 이해하고 인정하면서 대화를 통해 소통하여 더 좋은 관점으로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한다. 

관점 중의 최고의 관점은 하나님의 관점이다. 하나님의 관점은 믿음 소망 사랑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믿음 소망 사랑 안에서 사고하고 관점을 갖는 지혜를 열어가야 한다. 사람의 관점에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아갈 때 행복하다. 그리고 감사할 수 있다.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인품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필자를 비롯한 기독교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긍정적인 신앙의 관점으로 변화되어 교회 안팎은 물론 우리 사회의 훌륭한 인품들로 조명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최대 다수가 최대의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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