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로 엮는 성결교회 이야기 1367호
호남성경학교 시절 4.19혁명과 입대

        故 주환 장로
        故 주환 장로

주환은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여행객이 되어 여객선을 타고 육지로 가서 시외버스를 타고 광주로 3시간 동안 갔다. 그는 여전도사님이 써준 양림교회의 약도와 추천서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교회를 찾아갔다. 그 교회는 광주에서 처음으로 미국 선교사가 1924년에 설립한 붉은 벽돌로 된 큰 교회, 양림동장로교회였다.

이 교회는 교육관에 1955년 3년제 호남고등성경학교를 세웠다. 1963년에 호남신학교로 승격된 교역자 양성기관이었다. 그는 고등성경학교 교장 목사를 만나 여 전도사가 쓴 추천서를 드리고, 신앙과 사명에 대한 면접고사에 합격해 입학하고 무료 기숙사에 들어가 공부했다.

주일에는 실습을 위해 양림동교회의 주일학교의 모습을 관찰하며 가끔 설교도, 성경도 가르쳤다. 이 교회는 광주에서 가장 역사가 깊어 수백 명이 모이는 교회로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이 많았고, 일반 학력도 높고 신앙수준도 상당히 높은 유명한 교회였다.

그래서 그는 더욱 성경공부와 기도생활에 열심이었다. 그때는 시골 마을마다 교회들이 세워졌으나 교역자가 없는 교회가 더러 있어 성경학교 학생들이 전도사로 부임하여 주일마다 봉사하고 돌아왔다. 그에게도 자리가 났지만, 전도사가 되어 가르치기에 아직 멀었다며 사양했다.

그런데 그가 이 학교 재학 중에 1960년 4.19학생혁명이 일어났다.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4.19학생혁명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대학생 중심으로 매일 데모했다. 광주에도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이 공부를 거부하고 정부를 규탄하는 데모를 계속했다.

사회가 이런 혼란에 있었지만 당시 그의 학교나 교회는 보수적이어서 누구나 데모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고 국가를 위해 기도하면서 성경공부에만 매진토록 했다. 그는 생각이 달랐으나 학교의 방침이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의 사태는 갈수록 암담해져 갔다.

경찰들이 맨주먹으로 외치는 데모대에 총을 발사하여 전국에 수백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생기자 백성들이 분노하여 데모대를 지원했다. 사태가 심각하자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책임을 느끼고 “국민이 원하면 하야하겠다. 선거를 다시 하라”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물러났다.

임시 정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처음으로 내각제 총선을 실시해 민주당이 집권했고, 국회에서 대통령에 윤보선 씨, 총리에 장면 씨를 세워 새로운 정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4.19의 영향으로 전국의 도시마다 각종 데모가 연일 유행했고, 서울의 유치원 원아들도 나와 데모했다.

경찰들도 국민들이 무서워 경찰서나 파출소에 사복으로 근무했다. 사회의 질서가 무너져 살기가 힘들다며 개탄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신학생인 그는 나라를 위해 기도만 할 뿐이어서 그래서 더욱 간절히 기도했고, 교회에서도 국가의 질서 회복을 위해 예배 중에도 기도했다.

호남고등성경학교 재학 중인 10월 경에 그에게 입대 영장이 나왔다. 이 소식을 알게 된 학교의 동료가 자기는 돈 얼마를 주고 군대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해서 군대에 가지 않았다고 자랑하며 그에게 자기처럼 군대를 면하라고 조언했다. 그때는 그런 사람들이 무척 많았다.

4.19 데모로 새 정부가 섰으므로 좀 나아질 줄 알았으나 날마다 계속되는 전국의 데모 열풍에 질서를 잡지 못해 국가가 엉망이었다. 

그는 뇌물 주었다는 동료의 말에 화가 났다. “세상이 부패했다면 성도들이 이를 바로 잡아야지, 세상 유행을 따르면 소금과 빛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다. 나는 군대에 가는 것이 국민의 의무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입대하겠다”며,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그 길로 고향으로 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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