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눈으로는 사방이 다 보입니다. 살아온 지난날도 
빠지지 않고 보입니다. 진심의 목자이기보다는 
‘목회 기술자’로 살아오지 않았는지 더 살핍니다. 

5월이 6월로 넘어가는 이즈음, 들판에 보리가 익어갑니다. 산들바람에 실려 오는 보리 익는 냄새가 구수합니다. 쥐똥나무꽃이거나 밤꽃 향으로 그들먹합니다. 저녁 어스름부터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는 들판의 적막을 못 견디는 아우성으로 들립니다. 그 개구리 아우성 같던 벚꽃은 새까만 한으로 맺혀 버찌로 익어갑니다. 하늘에 가득한 핏빛 노을을 바라만 볼 수 없어서 서쪽을 방향 잡아 길을 나섭니다. 

며칠 내린 비가 씻어낸 하늘은 청명으로 가득합니다. 널디 너른 들판 가득 와 닿은 한 날의 마지막 햇볕이 마저 익혀 낸 보리밭의 저녁 바람과 섞여 그지없이 감미롭습니다.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친 사람이라도 이 이국적인 5월의 석양에 자신을 던져 넣으면 하늘과 땅에 가득한 생기에 흠뻑 젖어 새로워질 듯합니다. 폐부로 들어간 5월의 서정이 전신을 휘몰아 맑음으로 치환합니다. 정신 줄 아예 놓아 버리면 그 속에 더 깊이 녹아들겠지요? 5월이 더 길어 마음 목욕을 더 오래 하면 좋겠습니다. 이 5월이 다 가기 전에 교단 총회에 다녀오면서 맥없는 오지랖으로 결이 흐트러진 마음을 좀 달래야 할까 봅니다. 

두 손 사려 잡고 자박자박 들판으로 걸어 들면 초입에는 시인 되어 들꽃에 마음 둡니다. 사람이 손길 두어 기른 장미만 말고 혼자 자란 찔레꽃, 별꽃, 토끼풀꽃, 뱀딸기 꽃, 금계국, 기린초, 수레국화, 초롱꽃, 애기똥풀, 엉겅퀴, 달개비, 붓꽃, 고들빼기나 민들레도 지천으로 꽃불을 켜고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걸어옵니다. 예쁩니다. 다리를 두어 개 지날 쯤 이면 철학자로 탈피합니다. 뇌의 전원은 최대한 가동됩니다. 답 없는 질문들로 혼란한 시야에 물 잡아 놓은 논배미로 날아오르는 백로의 길쭉한 춤사위가 ‘아프락사스’(헤르만 헷세, 『데미안』에 나오는 신의 이름)에게로 날아가느라 알을 깨고 나온 새의 날갯짓이어서 허망해 보입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으면 광야로 길이 열립니다. 이 나라의 먹거리를 만드는 김제 만경 너른 들이 지금은 광야의 환영(幻影)입니다. 거기 지친 모세의 족적이 남았습니다. 더 멀리 아브라함의 허망한 발걸음은 갈지자로 찍혔습니다. 모래바람 속에 나그네로 살아낸 흔적입니다. 이삭의 리브가 만나던 감미로운 황혼의 들판이 너른 들에 벌겋게 물듭니다. 금세 적막한 야곱의 벧엘로 됩니다. 갈멜산 상 승리의 축제에서 급전직하(急轉直下) 광야의 도망자 되었던 엘리야 숨은 덤불을 지납니다. 해거름에 들판을 어정거리는 늙으신 농부는 애굽 벌판의 땀 흘린 노예들의 환영입니다. 개구리 떼창은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베르디 오페라 ‘나부코’)으로 들리니 환청입니다. 하늘이 더 붉은 아우성으로 가라앉고 두견새 우는 소리가 들판을 건너오면 광야 길은 혼란으로 자지러집니다. 나는 거기서 길을 잃습니다. 깨어나니 수평으로 난 벌판길에서 수직으로 날아오릅니다. 수평 거리로는 100km를 달려도 여상한 인간사인 반면 수직 거리는 100m만 솟아올라도 전혀 다른 세상이 보입니다. 그 방향이 필시 하늘을 향한 것이어서일 것이지요.  

‘드론’에 단 카메라처럼 날아오른 시야에 맺히는 건 청년 예수의 환영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 그리고 더 먼 훗날의 모세를 넘어 엘리야의 허망한 발걸음들 마저 안으로 꿍쳐 넣고, 견딜 수 없는 날짜를 굶어 엎드린 광야를 만납니다. 80도 넘은 노파처럼 첩첩이 웅크리신 예수님의 삭신 위로도 핏빛 노을은 여전하여 어쩌면 하나님의 이불 같기도 합니다. 아! 하늘의 이불로도 덮지 못하는 당신의 아픔이 더 진한 핏빛으로 찬연합니다!

곤두박질한 드론처럼 들판에 널브러진 정신을 가져다 몸뚱이와 다시 조합합니다. 부끄럽게 기름진 육신을 남루하신 청년 예수께 댈 수야 없지만 차곡차곡 안으로 접어 웅크립니다. 더 높은 ‘하늘의 드론’ 앞에 그저 한 점으로 응축되어야 하니까요. 

높은 눈으로는 사방이 다 보입니다. 살아온 지난날도 빠지지 않고 보입니다. 필시 팝콘처럼 부풀려 살아왔음이 발견됩니다. 혹자처럼 진심의 목자이기보다는 ‘목회 기술자’로 살아오지 않았는지 더 살핍니다. 

뭐든 졸이고, 또 졸이면 진액 되지요?. 웅크리고 또 웅크리면 그리될까요? 자신을 안으로만 끌어들여 체적을 최소화한 이슬방울이 햇볕에 영롱하듯 저 아득한 광야 길을 속으로만 걸어 들어 자신을 응축시키면 마침내 그분의 빛으로 그리 영롱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 첨탑 불빛이 닿는 데까지 석양의 산보가 영혼의 활력을 돋웁니다. 지구별에 사는 동안 내 일은 ‘무엇 함’에 초연하여 ‘무엇 됨’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오므려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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