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둑 칼럼니스트 박치문은 ‘검은 돌 흰 돌’(중앙일보, 2023년 6월 7일)에서 옛 바둑 책 현현기경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고수는 교만함이 없고 하수는 겁이 없다.” 그의 해설에 의하면 하수는 수읽기가 안되니까 앞 날의 변화를 알 리 없고 그래서 ‘겁이 없다’. 시간 때우기로 바둑두는 사람이라면 ‘겁없는 하수’라는 지칭을 받은들 무슨 대수이겠는가?

▨… 고수는 교만함이 없어야 진짜 고수라고 한다. 교만한 고수라도 바둑판의 문제는 바둑판 안에서 끝나니까 신경 쓸 것 없지만 세상이라는 바둑판에선 참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제117년차 총회 대의원들을 바둑에 빗대어 고수와 하수로 나누는 무례를 저지른다면 제117년차 총회는 고수들의 모임이었는지, 하수들의 겁 없는 무대였는지를 묻고 싶다.

▨… 한국성결신문은 1990년 7월 2일 한국성결소식이란 이름(발행처: 한국성결신문 운영위원회)으로 창간호 3만부를 발행하였고 신문의 운영 및 발간에 관한 업무는 교단 평신도국에서 관장하였다. 1996년 5월에 운영위원회 규정을 개정하여 사장제도를 시행하면서 비로소 한국성결신문은 평신도들이 솔선수범하는 자발적 활동기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 그러나 한국성결신문은 교단을 사랑하는 평신도들의 자기 희생과 헌신이 없다면 아직은 교단지로서의 소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는 진단을 뉘있어 부정할 수 있을까. 창간 33주년이 코앞이지만 신문제작용 컴퓨터 몇 대를 구비했을 뿐이고 그마저도 곁방살이일 뿐이다. 기자 모집을 광고해도 서울신대 신학과 출신들에게서는 아예 외면 당하는 사태가 빚어지는 곳이 한국성결신문이다. 자료실조차 없는 신문사 편집실을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이런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은 그래도 경제를 아는 평신도에게서라야 기대할 수 있는 것 아닐까하고 묻는다면 무지의 소치라 꾸중들을까.

▨… 한국성결신문을 어지럽히는 최근의 사태가 고수의 교만에서 비롯된 것인지, 하수의 겁없음이 연유가 된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고수, 하수의 신문을 향한 일치된 요청에는 언제나 ‘언론의 사명’과 ‘정론직필’이 있다. 물론 한국성결신문을 향한 언론의 사명, 정론직필 강조는 거듭 요구되어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언론이 살아야 나라(사회)가 산다는 것처럼 한국성결신문이 살아야 교단이 산다는 구호도 수용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교단을 사랑한다면 교단의 내일을 위해 한국성결신문을 사랑하자고 감히 당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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