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은혜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그 사람은 청년이라고 소개하기도 하고, 또 관리라고도 일컬어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소문난 경제인이었던 같습니다. 각 복음서에서 그의 부유함에 대해서 빠짐없이 기록하여 그의 부를 강조한 것을 보면 그는 막대한 재물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는 영적 목마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고 소개된 그 사람은 물질과 권력이 영원한 생명, 구원, 기쁨, 감사를 주는 통로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우리는 애시당초 세상의 물질로 만족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완벽한 에덴동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온 그를 향해 예수께서는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 19:21)고 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구원을 얻은 자가 제자가 되고 나면 그 때부터 청지기의 삶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삭개오가 예수님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눅 19:8)고 고백한 후 예수님께서 오늘 구원이 그의 집에 이르렀다고 하신 것을 보면 오히려 소유에 대한 결단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우선순위를 차지함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그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신 후 (마 19:21)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슬픈 기색을 하며 근심했습니다. 우리는 재물이 상징하는 세상의 것들을 우습게 보며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상가와 위대한 크리스챤들이 씨름하였던 주제가 바로 돈입니다. 이는 수도원이 청빈을 강조하였던 이유였습니다. 돈은 결코 적절한 위치에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형제, 친척, 부모는 물론이요 그 어떤 것보다 돈은 이 모든 것을 밀쳐내고서라도 자기가 우뚝 서려고 하는 것이 바로 돈의 성격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서 돈을 소유한 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켜왔던 그 사람은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서라도 영적인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 일이 있기 전 분명히 예수님께서 너희가 어린아이들 같이 되어야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우매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는 이 일을 기록할 때 마태가 ‘이두’(마 19:16) 즉 “여러분 여기 좀 보십시오”라며 주의를 환기시킨 이유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청년은 어린아이가 상징하는 특성과 달리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가지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더 쉽다고 여길만큼 불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정말 놀랐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재물이 상징하는 세상의 온갖 것에 욕심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영생은 사람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라고 하니까 마치 조건인 듯한 착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되신 그 분께서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그 분께서 말 구유라고 일컬어진 가장 천하디 천한 곳에 오신 것이 은혜입니다. 그 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은혜 아니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 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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