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은 나라와 민족을 초월하지만, 그렇다고 애국심과 배치되지도 않는다. 아니, 오히려 위대한 기독교인들은 모두 자신이 속한 나라와 민족을 뜨겁게 사랑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바로 그 애국애족의 마음으로 하나라도 더 많은 동족들을 구원하고자 자신의 생을 불태웠다.

심지어 회심 이후 모든 생애를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살았으며 자신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선언했던(빌 3:20) 바울 역시, 자신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자신의 마음에 원하고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고 고백했다(롬 9:1-5, 10:1).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탄식하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이는 곧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눈물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이기 이전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는 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야 하는가? 나라와 민족 사랑이라는 명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정작 그 근본적인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 사랑이 제대로 된 방향을 잃고 그저 절대적인 당위로서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폭력적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성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유와 목적을 바로 알고 나라와 민족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의 나라와 민족 사랑은 그 나라와 민족을 구원하는 것이 근본적 이유이자 목적이다. 이 민족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 그리스도께서 주신 진리로 그들을 자유케 하는 것, 이 나라를 예수 잘 믿고 잘 전파하는 나라로 세우는 것, 바로 이것을 위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목숨까지도 내던져 싸웠던 것이다.

한국교회도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가 애국애족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구한말, 안으로는 정치·경제·문화 등 사회 모든 면에서 절망적이었고, 밖으로는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암울했던 시대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민족을 깨우며, 이 나라가 살 길은 오직 기독교 신앙에 있음을 제시했다.

일제시대 및 건국과 산업화·민주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인들은 순교도 마다하지 않으며 거짓된 권력 및 사상과 맞서 싸웠고, 교회와 학교, 병원 등을 세우며 이웃의 필요를 채웠고,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권과 존엄을 누릴 수 있도록 나라를 발전시켜 왔다. 우리나라는 국가적으로 매년 현충일과 6.25 등이 있는 6월을 ‘호국 보훈의 달’이라 하여,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기린다. 이 기간 기독교인들은 이를 단순히 국가적 연례 행사 정도로만 여기지 말고, 이 나라를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며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기독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로 세우기 위해 희생한 이들을 기념하고, 그 뜻을 계승·발전시키고자 해야 한다.

동시에 이 나라와 민족 사랑이 나치즘이나 북한의 주체사상처럼 국수주의적 애국으로 변질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거짓 애국과 단호히 맞서서, 참되고 올바른 애국애족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 ‘호국 보훈의 달’이 바로 그 같은 삶을 위한 환기와 전환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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