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온통 고성과 다변(多辯)으로 
논리(論理) 없는 아귀다툼으로 지고 새는 
동안에도 오월의 녹색은 큰 위로가 된다

꽃잎이 향기와 함께 바람에 날려간 산길을 걷는다. 오월의 짙은 녹색이 햇빛에 반짝인다. 이맘때는 초록이 가장 아름다운 색이다. 보는 이의 마음도 싱싱하게 풍성하게 한다. 찬 서리 맞아가며 꽃과 열매를 안으로 품어 인고의 세월을 참아 낸 생명의 실체를 자랑한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평범한 산길에는 오월의 초록빛이 바람에 실려 아름답게 일렁인다. 나도 모르게 노래가 터져 나온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가 산을 처음 느낀 것은 우이동 백운대였다. 산이 좋았고 동행한 친구는 더 좋았다. 퇴직 후에는 장비도 갖추고 제법 높은 산에도 올랐다. 오르막길에 숨이 찬다. 멈추어 서서 하늘을 쳐다본다. 곧게 뻗은 우듬지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비켜서고 파란 하늘을 보여준다. 수관기피(樹冠忌避, Crown Shyness)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나무들이 광합성작용을 위해 서로 양보하는 미덕을 보여주고 있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을 읽다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기심에 분노했던 일이 생각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과 토르비에른 에켈룬의 『숲에서 1년』을 통해 많은 깨달음과 위로를 받기도 했다. 세상이 온통 고성과 다변(多辯)으로 논리(論理) 없는 아귀다툼으로 지고 새는 동안에도 오월의 녹색은 큰 위로가 된다. 

다시 걷다가 노랗게 군락을 이룬 꽃을 보고 폰으로 꽃 검색을 해본다.“이 꽃은 애기똥풀 꽃 90%”란다. 만일 식물에게 구원(救援)이 필요하다면 아마도 길가에 하늘거리는 이 애기똥풀 꽃이나 짙은 남색의 고깔제비꽃, 향기 은은한 때죽나무 꽃이 일 순위가 될 것 같다. 초록 풀밭에 누워 하늘을 향하고 멍 때리기를 해본다. 이룬 것이 별무하니 쌓인 것도 별로인 소박한 삶의 막바지, 치열했던 생명연습의 현장을 용케 견디고 난 지금, 자연의 신비로운 변화를 소박하게나마 누리고 있자니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그래서 산길에 앉아 창조주께 드리는 기도는 감사로 시작하고 감사로 끝난다. 일상에 쌓인 피로가 오늘 같은 오월의 녹색 산길에서 나도 모르게 드려지는 감사기도로 내가 정화된다.

 손이라도 적시고 싶은 파란 하늘, 자연이야 말로 자기를 내어주는 그분의 사랑의 향연 아닐까 싶다.  산길을 돌아 욱수계곡(旭水溪谷)으로 접어들었다. 이 계곡물이 모여 아래쪽에 욱수지(旭水池)를 이룬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내리면 계곡물은 찬란하다. 그야말로 욱수(旭水)다.  

바위에 앉아 다시 하늘을 쳐다본다. 지난 세월이 구름 타고 흐른다. 슬픔과 고통이 세월로 풍화(風化)되면 마음 어딘가에 환영(幻影)으로 남는다고 했던가, 환영이 비록 무력할지라도 때로는 속이 아리도록 아름다울 수도 있다. 문득 떠오르는 엄마 얼굴이 그렇듯이, 이 순간에 드리는 기도는 다시 나를 정화시킨다.  

오월이 가고 있다. 결국 어느 날 이 아름다운 녹색은 만산홍엽(萬山紅葉)이 되어 땅에 뒹굴다가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오늘도 헐렁한 내 배낭 속에는 ‘소백산 생수’ 플라스틱병 하나, 버려진 마스크 한 장이 비닐봉지 속에 수거되어 있다. 플로깅(Plogging)이나 줍깅 수준은 아니어도 보이는 대로 치우고 있다. 최근에는 깨어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이 작용한 듯하여 사뭇 상쾌하다. 

나는 산길을 내려간다. 아무도 나를 멈출 수 없다. 오직 한 분 외에는.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