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 1844-1900)에게 “왜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느냐?”고 혹자가 물었다. 그때 니체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들이 조금만 더 구원받은 사람들처럼 보인다면 나도 그들의 구원을 믿겠소.”

결국 문제는 먼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처신 여부에 따라 디딤돌이나 혹은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니체의 시선이 기준은 아니지만, 오늘 우리 성결인들의 현주소는 어디쯤일까? 성결의 복음은 충분히 그 매력을 발산하고 있을까? 냉소 혹은 무관심의 대상은 아닐까? 성결교회 믿음의 선진 중에는 성결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모델들이 있었다. 그들이 추구하고 맛보고 드러내고자 했던 바가 분명했기에 가능했다.

성결교회는 2007년 교단창립 100주년을 맞아 그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개신교 복음주의 웨슬리안 사중복음 신학’으로 합의한 바가 있다. 이는 넓게는 성결교회의 교리 및 신앙적 노선을 함의하는 것이기도 했다. 주지하다시피, 여기서 사중복음은 구체적으로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복음을 의미한다.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사중복음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성결교회를 성결교회로 자리매김하고 인식하게 하는 핵심적 신학 및 신앙 요소이기도 하다. 한국적인 상황에서 특히 성결의 복음은 장로교나 감리교 등 타 교파들과 구별되고 차별화되는 성결교회 신앙의 백미에 해당한다. 성결교회의 모체가 되는 동양선교회(OMS)는 물론 이명직 목사를 비롯해 한국성결교회의 초석을 놓은 대다수 지도자는 성결교회의 존재 이유를 성결의 복음에서 찾았다. 즉 성결교회의 사명이 성결의 복음 전파와 증진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면 성결이란 무엇일까? 여러모로 정의할 수 있지만, ‘하나님 형상의 온전한 회복’이라는 점에는 대체로 긍정하는 것 같다. 성결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변화이다. 이 때문에 성결이 ‘마음의 정결’로 정의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마음의 변화는 초자연적인 역사이다. 단지 심리적인 현상이 아니다. 따라서 성결의 은혜는 그에 대한 지적 동의를 넘어서 체험이 필요하다. 물론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데는 마음의 경험과 이성의 각성이 모두 필요하다. 그렇지만 신앙은 본질적으로 신비이다.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앙은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마음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가슴으로 경험해야 머리도 풀리게 되는 것이다.” 구원의 은혜도 그렇지만 성결의 은혜 또한 거룩한 빛이든 불이든 성령의 경험을 통해 얻게 된다. 그것은 산꼭대기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듯한 흥분되는 경험이며, 영의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고 싶은 열망을 갖게 한다. 

성결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보름달처럼 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성결의 은혜는 마음을 아름답게 한다. 그래서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보인다. 온 세상이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그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과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기 때문이다. 시인 이채의 ‘마음이 아름다우니 세상이 아름다워라’는 시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이 없고 곱게 보면 꽃 아닌 사람이 없으되 내가 잡초 되기 싫으니 그대를 꽃으로 볼 일이로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지만, 관계의 주고받기를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하지만 성결은 그것 이상이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는 것이다.

성결교회 제117년 총회를 앞두고 있다. 총회가 다루어야 할 사안이 많겠지만,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어떻게 시대의 언어와 문화로 담아내고, 그 지평의 확산을 위하여 지혜를 모으는 일에도 많은 에너지를 투자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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