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현대 교회에서 성전과 안식일과 대제사장의 
구약적 개념을 무분별하게 혼용·오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경각심을 일깨우고 싶었다

수년 전에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 뜨겁게 논란이 된 주제가 있었는데 바로 오늘의 ‘교회’가 ‘성전’인가? 하는 문제이다. 또한 이 사안은 ‘안식일이 주일’인가? 하는 문제와도 연동된다고 볼 수 있다.

혼돈과 혼란
조금만 진중하게 들여다봐도 전혀 고민할 일이 아닌데 의외로 여전히 많은 교회에서는 예배당과 교회와 성전을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강대상을 지성소 개념으로 이해하는 곳도 많으며 더 나아가 주일과 안식일을 동일시하고 대제사장과 목사의 정의를 혼용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 우려가 맞다면 매우 염려스러운 일이라 생각된다. 

한 사람의 목회자가 가장 중요한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목회적 필요에 따라 은유적 차원이나 광의적 개념으로 적용하여 가르치는 것과 개념 자체를 정확하게 정의하지 못하고 혼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전’이 아니다.
필자는 강대상에서 종종 교회를 성전에 빗대어 표현하고 적용할 때가 많다. 그러나 반대로 ‘교회가 물리적으로 성전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여 가르치는 일 또한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목회적 필요와 효과적인 이해를 위하여 성전에 관한 개념을 관용적 표현으로 사용한다 할지라도 내 목회지의 성도들이 이 중요한 개념을 잘못 이해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교회의 출발은 사도행전 2장 43절 이하에서 처음으로 감지된다. 사도들이 모인 날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마 28:1; 막 16:2; 눅 24:1; 요 20:1, 19)이고 여전히 유대인들이 주를 이루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교회의 초기에 여전히 안식일을 지키고 동시에 안식 후 첫날,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복된 날로 여기며 모이기를 힘쓰고 예배하였으며 주님의 약속을 따라 성례전을 지키기도 했다(행 2:1, 행 20:7).

이들이 모인날은 안식일이 아닌 안식 후 첫날이었으며 기도하고 떡을 떼며 예배한 장소는 성전이 아닌 다양한 장소였다. 더 나아가 스데반 집사의 순교 사건 이후로 교회는 급격히 흩어지고 바울을 통해 이방을 향해 나아갔으며 다양한 장소에서 더 다양한 사람들로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한편 구약성경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등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성전의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잘 알려주고 있다. 출애굽한 백성은 약 6개월 만에 시내산에 다다르게 되고 여기서 약 1년간 머물면서 ‘제사장 나라’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시스템을 5대 제사(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와  3대 절기(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의 규례에 담아낸 이스라엘 정결법의 총체다.

‘목사’는 ‘대제사장’이 아니다.
앞서 요약한 것처럼 교회와 성전은 매우 상이한 필요에 따라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고 그 구성원과 물리적 위치 또한 통합하기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의 교회가 성전과 동일시될 수 없는 것처럼 목사 또한 대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주장 역시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성전은 오직 예루살렘 성전 하나요 대제사장 또한 레위인이며 아론 계열의 단 한 사람만 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오늘의 목회자가 교회에서 1.안식일=주일, 2.성전=교회, 3.대세자장=목사라는 도식을 물리적이며 일방적으로 적용하며 목회적 핵심 가치로 내세우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여전히 교회는 이스라엘 정결법의 정신과 가치를 계승하고 있다.
필자는 오늘 현대 교회에서 성전과 안식일과 대제사장의 구약적 개념을 무분별하게 혼용·오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경각심을 일깨우고 싶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과 신약이 하나의 말씀이요 구약과 신약과 오늘의 교회는 창세 이후로 여전히 인류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선 하나님 백성들의 유기적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다. 

신학적 논의를 이어갈 때 자주 등장하는 ‘통전적’ 이라는 단어를 필자는 성경을 연구하고 오늘에 해석할 때 즐겨 사용하고 좋아한다. 

개념을 정의하고 분석할 때 우리는 진지한 학문적 자세로 맹렬하게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이것을 삶에 적용하고 특별히 유구한 역사에 대입 할 때는 ‘통전적 시각’을 반드시 견지해야 한다. 결국 물리적 적용을 시도하는 일은 엄중히 경계해야 하지만 그 의미와 가치와 사명을 오늘의 주일과 교회와 목사가 계승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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