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로 엮는 성결교회 이야기 1360
자비량 목회 40년!

성결교회가 제주에서 시작된 것은 6‧25전쟁 기간, 제주도에 유입된 피난민들에 의해서다. 제주도에 피난 온 성결교회 성도들은 장로교회에 흩어져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4후퇴 시에 제주도에 피난 온 성결교회 교인들이 1951년 5월 6일에 제주시 건입동에 천막을 치고 모여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마침 동양선교회(OMS)의 도움으로 전도지와 전도 경비가 조달되어 그 경비를 절감하고 제주읍 건입동 1238번지에 피난민과 원주민으로 구성된 80여 명 성도가 함께 예배드렸다. 동양선교회의 전도지 지원을 받아 총회에서 파견한 몇몇 목사와 제주 피난 교역자들로 축호전도대를 구성하고 1951년 8월부터 복음을 듣지 못한 이에게 전도한 결과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피난 교역자 오태상 강송수 김영구 정운기 이헌영 김성추 목사와 강진국 장로 이복녀 감시니 등이었다.

오태상 목사가 1951년 9월에 제주교회 제1대 담임 목사로 부임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성결교회 성도들이 건입동 999번지에 행정당국에서 피난민에게 지원하는 천막을 배정받고 성도들 몇 가구가 천막 집단생활을 시작하면서 9월부터 천막을 치고 나무판자로 비바람만 피할 정도로 간이건물 예배당을 세워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제주도는 4‧3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본 결손가정이 많았고 정신이상자와 귀신 들린 자가 많았다. 오 목사는 도원교회에 이어 제주교회에서도 자비량으로 목회했다. 피난민들과 원주민들의 위생환경이 매우 열악하여 인천 도원교회 초창기와 같이 장티푸스 독감 등 전염병이 돌았다.

오 목사는 환자들이 있으면 즉시 달려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진맥을 보고 약을 지어주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구호품으로 나오는 식량과 의류를 전해주고 약값도 받지 않고 기도와 침술로 치료하였다. 병이 깊은 환자는 큰 병원에서 치료받도록 주선해 줬다.

제주교회는 오태상 목사, 강진국 장로, 이승춘 전도사를 비롯한 몇몇 분이 피난민과 원주민을 위하여 열심히 전도한 결과 2, 3년 만에 80여 명이 모이고 자립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오 목사는 9‧28 서울수복 후에 상경했다. 1971년 서울 성북교회의 구역회원 28명이 종암동 조성봉 집사의 가정에서 교회 개척의 뜻을 모아 한성교회를 개척했다. 오 목사는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김치승 장로(후에 한성교회 담임 목사)와 자비량으로 동사 목회하여 1977년까지 한성교회의 자립과 부흥성장에 헌신하였다. 

그는 1978년 자녀들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슬하의 7남매를 자비량 목회로 사역하며 경제적 어려움에도 모두 대학까지 공부시켰다. 부인 문남조 목사는 LA 동양선교교회 협동목사로 봉직 중 1988년 소천했다. 

슬하에 장남 정훈, 차남 혜훈, 3남 철훈, 4남 수훈, 장녀 양자, 5남 영훈, 2녀 영숙이다. 차남 혜훈은 서울사대 교육학과를 졸업 후 미국 UCLA에서 교육학 박사를 취득했다. 4남 수훈은 한의사로서 LA에서 한의원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장녀 양자는 이화여자대학 졸업 후 미주성결교회 김풍 목사의 사모가 되었다. 김풍 목사는 강원 학산교회, 의흥 교회, 미주 산 페트로한인성결교회와 트레시(TRACY)한인성결교회를 섬긴 후 은퇴했다.

오 목사는 8‧15 해방 후 1987년까지 40여 성상을 한결같이 자비량 목회로 일관하여 3개의 개척교회에 자립교회의 씨앗을 싹틔우고 뿌리 내린 특이한 목회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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