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과 소명

현재 국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한 청년이 자신의 길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고 싶다며 고민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느 선택이 하나님의 뜻인지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는 자신의 원년을 기념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귀환시킵니다. 그때가 B.C.538년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605년에 1차 포로로 끌려간 것을 감안하면 70년 만의 귀환이었습니다. 비록 고레스를 통하여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만(렘 25:11), 그렇다고 해서 고레스가 소명 의식을 가지고 한 일은 아닙니다. ‘소명’이란 직업을 넘어섭니다. 모 초등학교에 재직 중인 여교사가 있습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학교에 일찍 도착하여 자신의 학생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학생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간절히 기도한 후 학급에 들어갑니다. 그녀가 학생들을 대하는 자세는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랐습니다. 

일반적으로 소명은 직업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직업’이 ‘소명’이라고 공식화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직업이 소명의 발견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려운 지역 여건으로 인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료선교를 꿈꾸던 의과대생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한 그는 현재는 기업인의 딸과 결혼하여 강남에서 성형외과 병원장이 되었습니다. 그의 집과 차는 점점 더 커지고 고급스러워졌습니다. 그는 과거의 비전을 따라 살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택이라는 미로에 가두어 놓으시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출구를 찾아 나오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테스트하시는 분일까요?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나’라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 앞 절 5절에서는 들에는 초목이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인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바로 초목과 밭에 채소를 나게 하는 ‘일’, 즉 다스리도록 (히. 아바드, 창 2:15)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부리기 위해서 창조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빠가 어린 자녀를 위해 장난감 블록을 사 주며 그 아이가 블록을 가지고 어떤 것을 만드는가 하는 것을 보는 마음처럼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기쁨을 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불순종의 죄로 인해 평생에 ‘수고’(히.아짜본, 창 3:17)하여야 하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기쁨과 감사로 여길 수 있는 ‘일’ (히.아바드)이 아픔과 고통을 포함하는 ‘수고’(히.아짜본, 3:17)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었다면, 죄를 범한 후 인간은 종으로서 주인을 위해 땀을 흘려야 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의 종류에 따라서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물론 어떤 경우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뜻은 어떤 ‘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목회자의 길을 걸어도 어떤 이에게는 거룩하지 못한 ‘직업’이 될 수 있고, 청소부가 되어도 거룩한 ‘소명’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일의 종류와 상관없이 산길을 오르는 등산객에게 점차 경치가 펼쳐지듯, 시간이 가면서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은 점차 하나님의 뜻 안에서 소명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려 할 것이 아니라, 나의 동기가 주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데 집중하십시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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