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일본 식민지가 된 것은
 ‘구한국의 힘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다시 나오는 것은 오래된 식민사학의 뿌리가 살아나 
친일·반역자들의 논리가 다시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한일 양국의 과거사 해법 논란과 관련해 전제할 것이 있다. 과거 불행했던 역사는 양쪽이 모두 극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서로 협력해야 하고, 미진한 것은 양보하면서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이 기본이 돼야 한다. 이와 관련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현명한 가르침은 ‘황금률’이라는 정의로 인류에 회자되고 있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 눅 6:31)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가정이나 사회나 나라나 국제간에 있어서,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 규범이다. 이 글은 나의 입장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데서 시작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한·일 관계 개선을 둘러싼 논란은 지난 1월 12일 국회에서 열린 ‘강제 징용 해법 마련을 위한 토론회’에서 외교부가 피해자들에게 줄 배상금을 일본 기업이 아닌 우리 정부 산하 재단이 우선 대신해 지원하는 방안을 거론하면서 다시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현재 대통령 퇴진 운동으로까지 이어지며 우리 사회 최고의 난제가 되고 있고, 앞으로도 쉽게 가라앉기 어려운 복잡한 맥락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강제 징용(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는 일제 강점기 당시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2018년 10월 30일 우리나라 대법원이 “일본 기업이 1인당 1억 원씩을 배상하라”고 최종 확정 판결하면서 한일 양국이 풀어야 할 숙제가 된 사안이다. 일본은 그동안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에 대해 개인에게 배상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해 왔으나 한국 대법원이 이 협정은 정치적인 해석이며 개인의 청구권에 적용될 수 없다고 최종 판단한 것이다.

국회 토론회 이후 뜨거워지기 시작한 한일 과거사 해법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이 3·1절 경축사에서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상당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이유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던 3.1독립만세운동을 비중 있게 평가하기보다는 일본이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글로벌 아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라는 점을 더 중시하는듯한 어조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3월 6일 정부가 제3자 변제안 해법을 발표하면서 이 문제는 ‘굴욕외교’라는 비판과 함께 활화산과 같이 타오르는 이슈로 부상했다. 3월 16일 윤 대통령의 일본방문에 이어 5월 7~8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방한으로 양국의 관계가 과거와는 다른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과거사 문제는 여전히 넘어야 할 산으로 놓여있다. 일제 침탈의 수법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가깝고 친한 나라였다. 땅을 맞대고 있는 중국 못지않게 고조선 때부터 친밀한 역사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와 가깝고도 먼 나라다. 사실을 판단하는 논리에 있어서나, 사실을 인식하는 인지적인 측면에 있어서나 일본은 우리와 멀다. 일본은 임진왜란 말기 정전협정 당시 조선 8도 중 경상 전라 충청 경기 등 4개 도를 내놓으라는 황당한 조건을 내세웠다. 그랬어도 조선은 임란 후 에도막부의 요청으로 약 200년에 걸쳐 조선통신사를 파견할 만큼 일본을 중후하게 대우했고, 그 기록은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그랬건만 1894년 갑오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일본은 조선의 요청이 없는 상태에서 인천으로 상륙해 경복궁을 점령했으며, 우리의 현실을 개혁해보자고 일어선 우리 농민군을 조총으로 백대일, 천대일로 사살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만큼 야만적인 침략행위이며, 1897년 조선이 ‘대한제국’ 국제를 반포하고 국외중립을 선언했을 때도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구한국의 힘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은 을사오적의 주역인 이완용의 발언(1919년 5월30일 매일신보)을 시작으로 일제에 편승한 사람들이 주장해 온 내용이다. 그런 말이 다시 나오고 있는 것은 오래된 식민사학의 뿌리가 살아나 과거 친일·반역자들의 논리가 다시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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