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화로 엮는 성결교회 이야기 1360
신실한 자비량 목회자

오태상 목사는 1948년 4월 15일 인천 도원교회 주임 교역자로 부임하여 자비량으로 성실하게 목회를 이끌어갔다. 

인천 도원교회는 1947년 10월 2일에 창립되었다. 1948년 4월 초까지 6개월 동안 교역자 없이 이근영 집사 집에서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고 있었다. 오 목사가 1948년 4월 15일 도원교회 제1대 목사로 부임했다. 

오 목사는 교세가 교역자를 모실만한 형편이 못되어 생활비 일체에 부담하지 않고 3년 동안 무보수로 사역했다. 오 목사는 해방 후 자비량 목회를 결심했기에 도원교회에서 무보수 사역을 기쁘게 여겼다.

오 목사의 설교는 성결교회 특유의 복음적인 메시지였다고 후에 서울 한성교회에서 함께 목회한 김치승 목사가 증언했다. 병자를 치유해 주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병 든 사자가 있으면 지체하지 않고 달려가 진맥을 보고 침술로 시술하면서 웬만한 병은 기도와 인술로 치유해 줬고 가난한 환자에게는 약값도 받지 않고 약을 지어주었다. 병이 깊으면 큰 병원으로 주선해 주는 자비를 베풀어 주는 목회였다.

“오 목사는 가난하고 병든 자에게 연민의 정을 쏟아부어 주는 인자한 사랑의 사도”로 도원교회 70년사에 기록되었다. 오 목사가 시무할 당시 인천은 주로 황해도에서 월남한 피난민이 많았다. 도원교회 성도 거의 가난한 서민이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위생이나 사회복지 환경 등이 열악했고 때로는 콜레라 장티푸스 말라리아 등의 전염병이 창궐했고 피부병 결핵 환자도 많았다. 빈민촌 서민들은 의료 혜택도 제대로 없었다. 오 목사는 그 서민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랑의 목회자였다. 오 목사의 자비량 목회는 도원교회가 자립교회의 씨앗을 싹틔우고 뿌리내리는 일을 감당하였다. 오 목사는 1951년 12월 29일 도원교회를 사임하였다.

오 목사는 1951년 1‧4후퇴로 아홉 식구 대가족을 이끌고 제주도로 피난했다. 1950년 북한군의 남침으로 민족 최대의 비극 6·25전쟁이 일어났다. 4‧3사건으로 좌익과 우익의 격전지였던 제주는 전쟁의 우려가 한층 더 컸다. 그러나 4‧3사건으로 선포되었던 계엄령도 해제되었고 수많은 피난민이 제주도에 유입되었다. 제주는 전쟁 기간 중 가장 안정과 번영을 누리는 장소가 되었다. 특별히 예수 믿는 사람들이 대거 제주에 유입되면서 제주교회들이 큰 성장을 하였다.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국론이 분열되었고 재산 피해와 인명피해도 대단했다. 피난의 물결이 이어졌고 북한에서는 자유를 찾아 1·4후퇴 때 피난민들이 대거 남쪽으로 말려왔다. 제일 안전한 제주로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지만 제주에는 오히려 새로운 기회였다. 

특별히 제주기독교는 더욱 그랬다. 전쟁 후에 엄청난 기독교인이 유입되면서 제주기독교는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피난민 대열이 제주도에 맨 처음 들어온 것은, 1950년 7월 6일이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제주항, 성산포 등지로 1만여 명의 피난민들이 입도하였고, 1951년 1월 14일 1·4후퇴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계속 제주도에 와 닿았다. 수천에 달하는 신도들이 끼어있었고 제주시를 비롯한 제주도 일원에 분산 수용되었다. 1908년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에 파송된 이후 해방 전까지 제주선교는 장로교가 주도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이후 성결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순복음교회 그리스도교회를 비롯한 다양한 교단들이 제주에 설립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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