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0년 어느 가을날, 윌 듀런트는 자택에서 갈퀴로 낙엽을 긁어 모으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잘 차려입은 사람이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건넸다. 당신이 나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 줄 수 없다면 자살할 생각이라고… 듀런트는 그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그 사람은 종내 수긍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회고하며 듀런트는 전세계의 지성인 100명에게 편지로 물었다. 그들 각자는 살아야 할 이유를 어떻게 찾았는가를.

▨… 듀런트는 자신의 요청에 답을 준 사람들과 자신의 답변을 정리해서 1930년 어느 가을날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던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한 답변서를 마련했다. (참조·신소희 옮김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 이 답변서가 듀런트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지만 자살을 고민하던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 만큼 흡족한 것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듀런트의 역사 이해를 따르면 추측은 가능할 것이다.

▨… “인간의 목표는 선사시대나 고대에 그랬듯이 여전히 이기적이고, 유치하고, 어리석고, 모순적이고, 살인적이며, 자멸적이다. 모든 것이 진보했다. 인간만 제외하고. 그리하여 그 모든 역사는, 인간이 축적하고 발견한 그 모든 것의 자랑스러운 기록은 종종 헛된 순환이자 맥빠지는 비극처럼 보인다”(윌 듀런트,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 이 부분에만 집착하면 듀런트의 역사이해는 우리가 스스로 절망하게 되는 인간을 전제하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을 갖게 만든다.

▨… 무엇보다 그의 그리스도 이해는 신학적으로는 많은 논란을 야기할 소지를 갖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인간됨을 개혁하는 혁명의 인간으로 이해하는(『문명 이야기』) 그의 시각(그리스도는 가장 위대한 혁명가)은 신선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우리 신앙의 본질과 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모르는 체하는 사태를 빚게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만은 꼭 바른 답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 시인 안은영이 ‘가끔은’이라는 제목으로 참 모자라는 우리 믿음의 허물을 가려주었다. 본인의 의도 여부는 밝히지 않은 채. “이 키로 /이 얼굴로 /이 뇌 용량으로 /이 성질머리로 /이 나이 될 때까지 /용케 버티고 있구나. /그래, 무명인으로 제 역할 하느라 이렇게 애를 쓰는구나. /냉철한 이성으로 스스로 채찍질해야 함도 맞지만 가끔은 내가 나를 어루만져 준다.” 그리스도 나의 주님께서는 이런 우리의 부끄러움도 받아 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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