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구약)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3~4)

구약성경에 부활이 없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건과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넘쳐납니다. 그 중에서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꼽으라고 한다면 누구나 ‘십자가’와 ‘부활’을 언급할 것입니다. 특별히 부활은 세상의 사람들에게도 충격을 주는 사건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부활’이라는 제목의 영화나 드라마가 심심찮게 나올 정도입니다. 인터넷 검색창에 들어가서 ‘부활’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면 4인조 그룹사운드에서부터 시작하여 각종 문학작품과 예술에서 이 용어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부활이라고 하는 말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친근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을 믿지 못하거나 혹은 최소한 구약성경에는 부활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 불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건져내실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하였을 뿐(단 3:17~18), 그들은 죽음이 닥쳐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외에도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마치 구약에서는 신약에서의 ‘부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에 대한 탄생과 재림에 대한 언급이 구약성경에서 명확하게 ‘예수님 탄생’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표현의 용어로 사용되지 않았다고 해서 예수님 탄생과 재림에 대한 예언이 없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성경에도 분명히 부활의 개념은 물론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이 넘쳐납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 부활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모세오경과 부활
더욱이 신약에서 부활로 번역한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라는 용어와 관련해서 구약성경에서 상응하는 히브리어가 무엇인가에 관한 논쟁이 여전히 진행중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부활로 번역되고 있는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라는 용어가 칠십인경 시편 65편 1절, 예레미야애가 3장 63절, 다니엘 11장 20절, 스바냐 3장 8절, 마카비2서 7장 14절, 12장 43절에서 그대로 사용된 것을 보면 구약성경에 부활이라는 용어가 없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어 보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재림은 물론이요 부활에 대한 예언 내지는 개념이 뚜렷이 존재합니다.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 바침 사건은 그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여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릴지라도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습니다. 하인들에게 번제를 드리고 올테니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고 하며 자신을 기다리는 종들을 향해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히.나슈바)”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고 해도 이삭을 데리고 돌아올 것임을(히. 나슈바) 말함으로써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려내실 것임에 대한 믿음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사건을 언급하며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과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히 11:18~19)이라고 재차 증언하였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부활이라는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100세에 아들을 주신 하나님은 자신이 아들을 죽인다고 하여도 다시 그를 살려 내실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요 11:25)이라는 부활의 믿음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과 부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언급은 시편에서도 예외가 되지 않을 만큼 풍부합니다. 시편 16편은 다윗의 선지자적인 예언시로서 베드로는 이 시편을 인용하여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면서 다윗을 예언자로 지칭하기도 했습니다(행 2:30). 특별히 시편 16편 10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을 결코 죽음의 상태(스올)로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시편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전했습니다(행 13:35). 

예언서와 부활 
무엇보다 구약에서 나타나는 부활의 백미는 에스겔에 나타난 마른 뼈의 환상이 될 것입니다. 주전 597년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모든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하리만큼 가혹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자기 백성에게 원수가 되신 분으로 비춰졌습니다.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은 ‘우리는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되리만큼 미래의 소망은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그들은 “살아있으나 우린 죽은 자와 같으며 마치 생명이 없으며 아무런 소망이나 미래가 없는 말라버린 뼈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겔 37:11). 최소한 그들 편에서 보면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해결책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뼈와 뼈가 붙고, 부드러운 살이 되살아나고 그 뼈들이 모여 군대를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에스겔이 본 환상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떤 영화나 예술 작품에서도 에스겔이 본 환상보다 더 생생하고 충격적인 상상을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예수님의 부활 장면을 제외한다면 하나님을 ‘생명의 주인이자 공급자’로서 이보다 더 강력하게 묘사한 성경본문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은 부활의 또 다른 표현이요 목격담입니다. 하나님은 생과 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의 확신을 주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 출신의 요나 선지자는 마치 부활을 직접 체험한 듯한 인상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 자체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들어갔던 물고기의 뱃속은 무덤이요, 산자가 아닌 죽은 자를 위한 장소입니다.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죽은 것과 다름이 없던 자로서 삼일 밤낮을 지냈습니다(욘 4:17). 하나님이 물고기로 하여금 그를 다시 육지에 토해 내게 함으로써 그는 다시 살 수 있었습니다. 이 세대를 향해 예수님은 요나가 밤낮 사흘동안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39~40). 물고기 뱃속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요나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실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구약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이외에도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예언은 넘쳐납니다. 우리는 그 어느 것 하나도 놓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간에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부활의 사건을 이해하고 믿는데 결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신약성경에서 주님은 부활하신 후 엠마오를 향해 내려가던 두 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과 동행하신 적이 있습니다. 두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슬픔에 잠겨 엠마오를 향해 낙향하던 글로바라고 하는 이름의 제자와 또 한 명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제자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동행하는 분이 예수님이시며, 그토록 낙심하며 슬퍼하는 이유가 예수님의 죽음 때문이라는 대화를 예수님과 나누면서도 정작 그 분이 예수님이심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실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들과 함께 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셨음을 깨닫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믿어지고 깨닫는 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초자연적 사건임을 깨닫습니다. 이와 동시에 그 두 명의 제자들이 자신들과 이야기하던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기 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눅 24:25~27)하셨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이란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의 어떤 부분을 설명하셨는가 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무엇보다도 구약에서 주님이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예언을 하나 하나 짚으며 그 말씀을 풀어나가셨던 것입니다. 이에 그들은 메시야는 고난을 당한 후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깨닫고 눈이 밝아져 그들의 눈 앞에 계신 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예수님의 부활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구약성경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증언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 15:3~4). 그는 ‘성경대로’라는 표현을 두 번 반복해서 사용했습니다.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언급한 성경은 당연히 ‘구약성경’입니다. 고린도전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아직 27권의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미 성경에서 예언했고,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부활하셨다고 전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모세오경과 시편 그리고 예언서가 말씀하는 부활의 사건을 공부하고 설명해야 할 이유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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