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플류도프에게는 전혀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가 새로운 생활조건에 들어갔다는 사실일 뿐 아니라, 그때부터 그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생활의 이 새로운 시기가 어떤 모양으로 결말을 맺을지, 그것은 미래가 보여줄 것이다.” 톨스토이의 『부활』의 마지막 부분이다. 대문호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단편적이지만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어서 거듭 읽게 된다.

▨… 소설이기에 가능한 줄거리이겠지만, 톨스토이의 부활은, 몸과 마음이 망가진 한 여인에 대한 죄책감에서 그 여인을 따라 시베리아 유형살이를 겪는, 한 젊은 남자의 영혼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여인의 삶이지만 그 삶에서, 한 젊은 남자는 자신의 영혼이 정화되는 현상을 체험한다. 그 체험을 통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생활을 결단하는 한 남자의 변신을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결정짓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빗대어 한 인간의 부활로 맞아들여도 무방할까.

▨… 아닐 것이다. “톨스토이의 『부활』이 기독교의 부활교리에 대한 필요하고도 충분한 풀이는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요한 한 부분을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이상범, 『신앙없는 천재 재능없는 신자』) 도대체 어떤 소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성서가 증언하듯 증언해서 우리의 마음을 감화감동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겠는가.

▨… 그러나 우리는 톨스토이의 『부활』을 통해서 가장 기독교적인, 가장 종교적인 향훈이 강한 부활이라는 교리를 비종교화해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안내 받았다고 한다면 기독교의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경시하거나 모독하는 것이 될까. 아닐 것이다. 손가락질 당하는 여인의 삶 뒤편에는 한 남자의 영혼이 정화되는 또 다른 삶이 감추어져 있듯이 이 시대의 신앙인들에게는 비종교적인 언어들이 기독교적 언어로 변화될 수 있음도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 흔히들 말한다. 바르트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말씀이고 본회퍼의 그리스도는 성도의 사귐 속에서 실제로 체험되는 하나님의 현존이라고. 이 비교 속에서도 우리는 확인한다. 교회를 사귐으로 이해하는 본회퍼 신학의 이해는 그만큼 비종교적이고 세속적 이해 아닌가. 올 부활절엔 가나안 교인화하는 MZ세대 접근을 위해 비종교적 언어 선택도 고민할 때가 되지 않았는지, 자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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