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만 장로 (큰나무교회, 전 국민일보 편집인)

편집위원 임순만 장로(큰나무교회)
편집위원 임순만 장로(큰나무교회)

“이제부터 우리는 대한제국의 신민(臣民)이 아니고 대한민국의 국민입니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엄숙한 순간입니다. 얼마나 기다린 일입니까. 이제 우리 대한민국은 정식으로 수립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일본에 승리하고 환국해서 정식으로 태극기를 게양하고 건국의 선포식을 할 때까지 우리는 ‘대한민국임시정부’라고 불러야 합니다.”

사회를 하던 의장이 문득 말을 멈췄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누군가 올드랭사인 곡에 가사를 붙인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이 든 29명의 대한민국의정원(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회) 의원 전원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함께 애국가를 불렀다. 1919년 4월 11일 아침 중국 상해시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 내 현순 목사의 임시 거택, 밤을 새워 회의한 끝에 석오 이동녕 의장이 우리나라 최초의 성문법인 임시헌장 10개조를 공포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음을 선포한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은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이래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고려, 조선, 대한제국 등 왕을 최고 지도자로 했던 우리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세워 국민이 주인이 되는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 시대를 연 역사적 사건이다. 3.1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의 절반이 기독교인이라고 알려졌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의정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끈 사람들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다.

무엇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사람이 임시의정원을 이끈 석오 이동녕(1869~1940)이다. 훗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그는 기독교 정신으로 겸양의 한평생을 살았다. 서울 상동교회에 출석했던 석오는 전덕기 이회영 김구 같은 교인 동지들과 친교하며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상해에서 석오를 모셨던 우승규(독립운동가·언론인)는 “석오는 아침저녁 간이음식점에서 월 7원짜리 바오판(包飯, 저렴한 포장음식)을 숙소로 날라다 드시면서 오직 조국의 광복만을 기도하셨다.”고 한다. 

이석영 이회영 이시영 6형제는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전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갔다. 당시 6형제가 처분한 재산을 현재의 쌀값으로 환산하여 1천 억원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지만, 이는 상당히 저평가된 금액이다. 둘째 이석영의 재산만 해도 그가 집 가오실(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에서 한양에 올라올 때 남의 땅을 밟지 않았다고 황현의 <매천야록>에 전하는데, 동대문에서 가오실까지 거리가 30km가 훨씬 넘으니 남의 땅을 밟지 않았다는 것이 과장된 표현이라 하더라도, 6형제가 처분한 재산은 지금 돈 수 조 원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만주로 가 민족의 자치단체인 경학사와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투사를 육성하다가 감옥에서 죽거나 굶어 죽었다. 6형제 중 36년 뒤 해방이 되었을 때 살아 돌아온 사람은 다섯째 이시영뿐이었다. 성재 이시영(1869~1953)은 1945년 11월 환국할 때까지 홀로 조석을 해자시며 임시정부의 재무를 꼬장꼬장하게 처리했다. 6형제의 대가댁 마나님들은 영하 30도 칼바람 속에서 만주에 따라온 종들에게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버선을 기워주며 섬겼다. 

한 사회가 망했을 때 그 사회에서 영광을 누리던 사람들이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를 무섭도록 치열하게 보여준 것이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참모습, 책임지는 기독교인의 자세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대면 예배가 주춤하면서 이 사회 신앙의 열기가 식었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다. 그 사이를 틈타 정명석, 전광훈 목사 등 목회자들의 부끄러운 소식이 항간에 오르내린다. 크리스천의 실천윤리를 생각한다. 


*지난 1347호(1월 21일자) 필자의 칼럼 <관용이 사라져가는 사회> 내용 중 ‘1932년 조선건국’은 1392년의 오기이므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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