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석현 목사 (인천남지방 · 간석제일교회)

카나리아는 씨앗과 작은 곤충을 먹고 살아가는 되새과에 속하는 새다. 크기는 2~13cm로 작고, 무게는 약 15~20g 정도로 새털처럼 가볍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이 새가 사람을 살린다. 

카나리아는 1896년부터 1986년까지 유독가스 검출 전기 장치가 도입될 때까지 90여 년간 캄캄한 땅속에서 석탄을 캐는 광부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했다. 당시 탄광 갱도에서 조랑말은 좁고 낮은 곳에서 석탄을 옮겼다. 새장의 카나리아는 즐거운 노래로 분위기를 띄워 주다가 일산화탄소 등 공기 중의 독성물질을 흡입하여 의식을 잃으면 노동자들은 새장을 들고 갱도를 탈출하여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탄광의 카나리아는 모두가 괜찮다고 느낄 때 위험을 감지하는, 그래서 사람들을 일깨우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탄광의 카나리아는 눈앞의 위기를 사전에 예고해 주는 존재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1990년대 말, 오트버그(John Ortberg)는 시카고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꽤 알려진 설교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그러나 그는 대형교회의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윌라드(Dallas Willard)에게 전화를 건 그는 “제가 바라는 제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삶에서 바쁨을 가차 없이 제거해야 해, 바쁨은 우리 시대에 영적 삶을 방해하는 큰 적이야”.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은 “사탄이 우리가 죄를 짓게 만들 수 없을 때는 바쁘게 만든다”라는 말을 했다. 맞는 진단이다.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바쁜 목회가 정답인 양 여겨지던 시기였다. 곧 쉴 틈 없이 목회에 열정을 쏟아붓고, 성도들을 심방하며, 각종 소그룹 모임과 성경공부 등 빈틈없이 짜여진 계획표대로 움직여야 교회는 성장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경영학 교수 마이클 지가렐리(Michael Zigarelli)는 바쁨이 영적 성장을 방해하는 주된 걸림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너무 바쁘다. 바쁘게 사는 것이 죄인가? 아니다. 바쁨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이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는 것이 문제다. 이러한 바쁨 때문에 급기야 하나님과 관계가 악화된다. 바쁘게 지내면 지낼수록 악화일로(惡化一路)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목회는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시절, 나 자신의 내면에 변함없이 새겨진 비전은 ‘교회 성장’이었다. 바쁘게 움직였고 조급해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 성장마저도 요원한 것이 현실이 되었다. 

세월이 조금 지나 돌이켜 보니 목회가 달리 다가온다. 목회는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내가 설교하며 성도들에게 요구했던 대로 내 자신이 먼저 살아내는 삶이었다. 그것에는 교회의 크기와 성도의 수는 의미가 없다. 성공과 실패의 의미도 없다. 오직 하나, 살아내는 것이 참된 의미다. 그래서 목회는 힘든 신앙의 여정이다. 

최근에 목회 컨설팅 컨설턴트 자격으로 작은 교회를 섬기기 위해 이름도 모르고 교단도 다르고 주님이 아니면 전혀 만날 수 없는 교회와 목회자를 만났다. 늦은 나이에 신학을 시작했고, 기존 교회의 부교역자보다는 개척이 성격에 맞는다는 목회자였다. 그에게서 목회란 살아내는 것이라는 명제를 다시 한번 새기게 되었다. 

과거 한국교회의 성장 모판은 시골교회와 도시의 작은 교회였다. 이들이 탄광의 카나리아였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장이 시골교회에서 도시의 큰 교회로, 도시의 작은 교회에서 더 큰 도시교회로 성도들이 수평이동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과거나 현재나 살아내고 있다. 그러나 살아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현재 시골교회는 어린아이나 젊은이 자체가 거의 없다. 도시에 있는 대부분의 작은 교회는 탈진과 침체가 반복되어 성장과 건강한 교회를 세울 여력조차 없는 경우가 다반사다.

영적 카나리아의 역할을 했던 이들 교회들이 힘들다고 한다. 위험을 감지하고 버겁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을 겪으며 어렵지 않은 교회가 없겠지만 특히 시골교회와 도시의 작은 교회가 심각하다. 한국교회 부흥의 시기에 영적인 카나리아의 역할을 했던 이들 교회를 도와야 한다. 견뎌낼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 한다.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우리가 왜 무엇이 바쁜지 되짚어 보아야 한다. 사순절을 보내며 그동안 목적 없이 나아갔던 바쁨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함께 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묵상해야 한다. 교회는 본디 서로의 짐을 대신 지며, 자신을 비우며, 서로의 아픔을 나누며, 힘든 시간을 함께 견뎌내어 서로를 살게 만드는 예수의 생명체이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