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훈련하면 순기능적으로 쓰임 받습니다
개를 훈련하는 최상의 방법은 따듯한 사랑입니다

‘괴물 잡으려다 괴물 된다’ 그럽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삐뚤어진 사람을 대하는 자세에 경종을 울리는 말입니다. 교회 안의 ‘나쁜 사람’을 어쩌면 좋을까요. 많이 관찰하고 고민한 결과를 미리 폭로하면 불행히도 답이 없습니다. 아니 방법이 없습니다.

법으로 다룬다고요? 어림없습니다. 교회법에는 강제력이 없잖아요. 수찬 정지, 근신, 정직, 파직 출교 등이 죄의 책임을 묻는 형벌인데 대부분 체면 징벌입니다. 양심이 망가져서 수치심을 잃은 사람에게는 전혀 죄책이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받은 징벌, 저기로 옮겨가면 치외법권입니다.

여기서 나쁜 사람이 저기로 옮겨가면 순한 양이 되기도 합니다. 인신을 구속하거나, 경제적 의무를 지우는 등의 징계는 세상 법정에서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교회가 그 일로 세상 법정에 나앉는 순간 돈 쓰고 시간 쓰고 감정 낭비합니다. 교회의 본질에 측정 불가의 손해를 입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받아 든 결과로 나쁜 사람들이 잘 처리되느냐면 언감생심입니다. 다툼이 더 깊어질 따름입니다. 교회만 망가집니다. 역기능적 교회가 됩니다. 그야말로 괴물 잡으려다 괴물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을 ‘양’으로 표시합니다. 가장 선한 구성원입니다. 순하고, 착하고, 약하고, 목자의 인도를 잘 따르는 무리입니다. 교회의 법은 그런 양무리들이 살아가는 규범일 뿐입니다. 그런데 더러 역기능적인 구성원인 염소도 있습니다. 제법 주도적인 무리이지요. 교회의 규범으로는 통제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구별에 왼편에 두시고, 책망하시는 무리입니다.

또 다른 구성원은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빌 3:2)라는 말씀에 나오는 ‘개’입니다. 낯설지만 분명히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에 들었습니다. 매우 주도적입니다. 언어나 행실에 불량기와 폭력성이 배어 있습니다. 섭취하는 먹이부터 양이나 염소가 먹는 풀이 아닙니다. 주인이 먹는 걸 같이 먹으려 듭니다. 양이나 염소처럼 목가적 환경에서 평안히 먹는 게 아닙니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주위를 살피고 매우 공격적으로 먹습니다. 삶의 기준이 교회의 가르침에 있지 않습니다. 살아오면서 형성된 자신의 가치관, 경험에 기초해서 삽니다. 결코 교회법으로 강제할 수 없는 무리입니다. 

교회 와서 예배 시간에 함께 앉아 있지만 말씀의 꼴을 사모하는 게 아닙니다. 혹시 내가 건질 수 있을 모종의 이익을 탐하는 구성원입니다.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사56:11) 하였으니 건강한 양들은 이런 부류와 상종을 자연스럽게 꺼립니다. 대결할 힘도 없지만 순한 양들로는 도무지 이겨낼 수 없는 무리입니다. 교회가 무너져도 마지막까지 그 자리를 뒤져서 먹을 것을 탐하는 본성입니다. 그래도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인 걸 어쩌겠습니까.

개는 뭅니다. 개가 있는 교회는 교회의 다른 구성원들이 물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물리면 고통스럽습니다. 말할 수 없이 수치스럽습니다. 더 깊은 조심의 이유는 목자나, 구성원을 문 개가 살아남겠습니까? 교회의 주인이 계시니 구성원을 문 개는 그 일에 맞게 다루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 개를 위해서도 물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교회의 가르침으로 감당할 수 없는 ‘개 같은 성도’를 어찌해야 할까요. 개가 가진 폭력성을 순기능적으로 사용할 방법은 없을까요?. 그러고 보면 ‘보더콜리’라는 양몰이 개도 있습니다. 욥은 “내 양 떼를 지키는 개”(욥 30:1) 라는 말을 남김으로 이미 양을 지키는 개가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개도 순기능적인 교회 구성원이 될 수 있습니다. ‘보더콜리’처럼 양을 습격하는 짐승들로부터 양 무리를 지키는 일입니다. 견강부회 같지만 중세의 타락한 교회 조직을 향해 맹렬히 짖어대며 양들을 지켜낸 ‘마르틴 루터’ 같은 개혁자들을 교회의 본질을 잘 지켜낸 충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호교론적 부르짖음이 오늘의 교회를 교회로 만들었거든요.

교회가 치르는 여러 종류의 회의에 참석합니다. 그 모든 구성원 중에도 양, 염소, 개 같은 역할들이 있다는 발견입니다. 개는 훈련하면 순기능적으로 쓰임 받습니다. 개를 훈련하는 최상의 방법은 따듯한 사랑입니다. 교회는 어차피 사람의 질을 가리지 않고 사랑으로 품어 내기를 결사(結社)하는 공동체입니다. 그 품에 물려는 본성으로 달려드는 철없는 개조차 품어 양 지키는 개로 변화시키는 게 따뜻한 사랑의 힘입니다.

이 땅에 보신탕 문화가 사라져 갑니다. 사람들끼리는 갑론을박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리를 떠도는 개들에게는 초복, 중복, 말복도 두렵지 않고 천수대로 살 희망입니다. 그런 ‘시고르자브종’들에게도 희망이 있을진대 교회 안에 든 무리에게 희망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개 같은 구성원들’에게도 진정한 희망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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