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형준 목사(인천서지방 · 동산교회)
조형준 목사(인천서지방 · 동산교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는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그중에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줍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 후에 율법교사에게 물으십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 이 때, 율법교사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비를 베푼 자’라고만 말할 뿐입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유대인의 이웃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하나 더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이 둘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를 표현하자면 ‘이웃 찾기’와 ‘이웃 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웃 찾기’는 내가 주체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웃 되기’는 상대방이 주체입니다. 그가 나를 이웃으로 여기고 마음을 열고 어우러지는 것이 바로 ‘이웃 되기’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 부부가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거지가 들어와서 구걸을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마음이 짠해서 만 원짜리 한 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은 그 거지를 붙들고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어서 이렇게 되었는지를 묻고 그에 대한 대답을 들은 뒤, 그를 위해 기도해주고 복음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때, 이 거지는 목사님에게 마음을 열었을까요, 사모님에게 마음을 열었을까요. 목사님은 ‘이웃 찾기’했고, 사모님은 ‘이웃 되기’를 한 것입니다. ‘이웃 찾기’와 ‘이웃 되기’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공감’입니다. 

6년 전 서울의 한 지역에서 주민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안건은 공립특수학교신설에 관한 건이었는데, 토론회를 시작하자마자 주민들이 고성과 욕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토론회가 무산되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집 값이 떨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에 충남 교육청에서 중증장애아를 위한 특수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설명회가 열렸는데, 이곳은 달랐습니다. 주민대표가 말했습니다. “장애 학생이 늘어나면 지금의 장소도 좁을 텐데 시의원들이 예산확보를 더 해야 한다. 장애를 가진 것은 잘못이 아니고 우리 주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고, 공감하며 그들이 나를 이웃으로 여기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이웃 되기’입니다. 

지금 시대는 점점 더 개인주의화되면서 남처럼 여겨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남녀가 대치되고, 여야가 대치되고, 심지어 한 몸인 교회 안에서도 서로 대치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남이 되어있는 자에게 이웃이 되어주라고 말씀합니다. 즉, 공감하라는 것이요, 마음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소자가 헐벗었을 때에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가서 위로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웃 찾기’를 넘어, 시대가 공감하며 인정받는 ‘이웃 되기’의 모습을 만들어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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