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17절a)라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쫓아가야 하는 것이기에 이 말은 좀 어색합니다. 그런데 16절의 내용을 보면 조금 이해가 갑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그대로 행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스토이케인(στοιχειν)’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에는 ‘일렬로 걷다’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히말라야를 등산할 때 없어서는 안 되는 안내자가 바로 ‘셰르파’입니다. 이들은 히말라야를 잘 압니다. 그래서 이 셰르파를 선두로 산을 오르곤 합니다. 그런데 높이 올라갈수록 그 뒤를 잘 따라가야 합니다. 혹시 눈 밑에 ‘크레바스’(빙하의 갈라진 틈)가 있기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가면 거기에 빠져서 생명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맨 앞의 사람을 보고 가지 말고, 바로 앞 사람의 발자국을 보고 가야 합니다. 그것이 제일 확실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화 같은데 보면 등반하는 행렬은 언제나 일렬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로 인해 예수를 알게 되었고, 믿음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바울은 믿음의 길에 선 선배이자 안내자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길이시니까 예수님만 바라보아야겠지만,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바울의 모습이 가장 확실한 믿음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 하면서 나의 연약함 때문에 시야에서 예수님을 놓치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무 어렵고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때에는 신앙의 본이되는 믿음의 선배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도전을 받기도 하고, 새롭게 길을 찾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빌립보 교인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본받으라”라는 말은 교만함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더불어, 그들이 나의 발걸음을 보고 따라오고 있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했던 말인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새신자가 등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새신자가 새벽예배부터 모든 예배를 다 나오는 것입니다. 너무 열심 있는 모습에 목사님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혹시 신천지인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점검 차원에서 물었습니다. “새벽마다 기도하시는데 무슨 기도의 제목이 있으신가요? 제가 중보해드리겠습니다.” 그랬더니 그 새신자가 대답했습니다. “원래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 아닌가요?” 알고 보니 그분을 인도하신 권사님은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는 FM 신자였습니다. 그 권사님이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가르치면서 함께 다니셨던 것입니다.

좋은 부모님 밑에 좋은 자녀가 나오기 마련이고, 좋은 구역장 밑에서 좋은 구역원이 생기기 마련이며, 좋은 목사님 밑에서 좋은 성도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오늘도 내 뒤에는 나의 걸음을 보고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너무 멀게 느껴져서, 어떻게 신앙생활할지 몰라 당장 눈앞에 보이는 목회자의 삶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 과연 나는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요? 

오늘도 바울의 마음을 묵상하며 큰 부담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목회의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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