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퇴하기 전에는 교단 일에도 많이 참여해서 이름을 밝히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어느 원로 목사가 전화를 주셨다. 남녘의 작은 도시이지만 교인 재적수나 재정 규모로 보았을 때 그 규모가 엔간하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는 교회인데 부교역자를 구하지 못해 담임 목사의 시름이 깊어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부교역자를 추천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전화를 준 성의를 외면할 수 없어 물었다. “어떤 부교역자를 원하시는가요?”

▨… “교단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면 됩니다. 단, 신학공부를 많이 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 보다는 우리가 그분의 영성을 존경할 수 있는 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머릿 속이 조금씩 멍해져 갔다. 마치 노년에 전신마취한 후 수술을 받고 조금씩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나 빗대어 볼 느낌 같은 것이었다.

▨… “알았습니다. 알아보겠습니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허물을 가려가며 이야기할 사이는 아닌 상대방도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치를 챘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다시는 입을 떼지는 않으리라. 섬망증세 속에서도 콕 집어낸 결의를 다지느라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조건인데 수술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한 몸과 정신이 과민반응을 일으킨 결과일까.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해 곱씹고 있음을 밝혀두고 싶다.

▨… 그러나 한마디만은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신학공부를 많이 하려는 마음과 존경할 수 있는 영성이 왜 대비되어야 하는가. 아니, 대비되어질 수 있는 문제이기는 한가? 지난 시절 한때 우리교단에서는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 조건으로 신학공부 보다는 영적 체험이 강조되던 시절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목회자에게는 수레의 두 바퀴 같은 것 아니겠는가. 비교하거나 우선순위 운운할 사항은 아니지 않겠는가.

▨… 헨리 나우웬에 의하면, “목회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가 즐겨 사용한 ‘영성형성(Spiritual Formation)’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의 과정을 일컫는 표현이다. 그것은 목회자에게만 강조되는 말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청되는 신앙의 필수조건(『상처 입은 치유자』)이다. 상업주의적 성공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시대이니 ‘신학과 신입생이 해마다 줄어드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신학에의 길을 우리도 너무 쉽게 생각하는 타성에 젖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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