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예지가 뛰어났던 지도자로 정평
충무교회 강남 시대 열어, 부흥 견인
유신반대 기도회 등 신풍운동 주도
교계 진보·보수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 

전 총회장 고 최건호 목사는 통찰과 예지, 판단력이 뛰어났던 교단의 대표적 지도자였다. 성공한 목회자로 존경을 받고, 진보와 보수를 넘나들며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이끌었다.

최건호 목사는 1936년 8월 20일 서울시 종로구 필운동에서 출생했다. 1945년 12월 대전중앙성결교회에 입교하여 1954년 임영재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부여성결교회 열성 청년으로 소문났고,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여 법학으로 성공하겠다는 야망을 품었으나 집안 사정으로 법학을 포기해야 했다. 인생의 꿈과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교회 새벽기도회를 다니며 진학과 진로를 위해 기도했다. 그렇게 새벽기도에 열심을 내던 중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다. 본인도 두려웠고 부모 형제들도 반대했지만 교회에서는 그가 목사로 헌신하도록 격려했다.  

1956년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새벽기도를 인도했던 이명직 목사는 성결하고 청빈한 성자형 지도자로 최 목사의 영적 멘토가 되었다. 신학교 3학년 시절, 충남 수고교회 예비전도사로 첫 사역을 시작했고 총회본부 주일학교전국연합회 초대간사를 거쳐 강원도 양구교회 전도사로 섬기면서 다양한 목회훈련 과정을 거쳤다. 그 후 서울 도봉동에 작은 기도처(현 도봉교회)에서 개척목회를 시작했다. 교회가 생계비를 지원할 수 없었으나 어느 학교에서 교목실장으로 청빙해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개척목회를 꾸려갔다. 5년간 도봉교회 개척목회를 하다가 서울 녹번동 성광교회로 부임했다. 1974년에는 당시 교인수가 300명이 넘는 큰 교회였던 충무로교회로 부임했다. 그를 충무로교회로 이끈 인물은 서울신대 은사이며 충무로교회 전임자인 김석규 목사였다. 젊은 목사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교회 담임목사로 목회사역을 시작할 때 두렵고 떨리는 심정이었다.

1970년대를 접하면서 서울 강남 개발과 함께 강남 선교가 교계의 큰 관심사였다. 충무로교회는 강남 선교 시대를 예측하고 강남 이전의 용단을 내렸다. 1977년 당시 허허벌판인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교회신축대지 583평을 매입하고 이후 130평을 추가 매입하여 강남 선교 시대를 열었다. 1979년 교회 명칭을 ‘충무교회’로 개명했다.

충무교회는 강남으로 이전한 후 획기적으로 부흥, 성장하여 장년예배가 3부로 드려지게 되었다. 1980년 10월 1차 총동원전도주일에 성도가 857명에 이르자 교회성장의 기틀이 마련됐다.

최건호 목사는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하는 학구열이 뜨거운 목회자였다. 신학대학교 졸업 후 10년 만에 늦깍이 대학원생으로 입학했다. 매일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종로 시사영어학원으로 달려가 시사영어반과 회화반을 반복해 수강했다.

서울신학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후 해외영어연수 겸 목회자 훈련과정에 참여했다. 미국의 제3세계 교회지도자 훈련을 지도하는 하가이 박사가 세운 선교훈련원에 자원했다.

1986년에는 장학금 7천불 이상을 받고 보세이 에큐메니컬연수원 수강생으로 입학 허락을 받았다. 세계교회협의회(WCC)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기관의 추천을 받아야 참여할 수 있었다. 보수 교단 목회자였으나 특별기회를 열어준 것이다.   

 그는 탁월한 설교가이기도 했다. 늘 강단의 설교사역을 소중히 생각하고 힘을 기울인 까닭이다. 서울신대 신학생 시절 새벽마다 경건하고 성경적인 설교를 들려준 이명직 목사에게 큰 감명을 받고 그분처럼 설교하기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또 뛰어난 부흥사요 영적 지도자였던 이성봉 목사, 은사였던 김석규 목사, 교계의 큰 지도자였던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등을 흠모하며 설교의 기술을 익혀갔다. 동화창작과 문장연습, 동화구연법을 습득했던 경험이 설교 작성과 전달훈련에 도움이 되었다. 

목회자로서 평신도운동의 활성화에도 기여했다. 평신도 전도훈련, 평신도 직장인예배, 평신도 군대선교활동을 시작했다. 또 해외 교인들을 중심으로 해외교회를 개척하고 해외자매교회를 통한 해외선교, 해외선교지 신학교 지원 등 충무교회 해외선교의 기틀을 닦았다. 

교단, 교계, 대사회 봉사 활동도 왕성했다. 1961년 교단 교회학교 성경교재를 편집하고 집필했으며 출판보급업무를 담당했다. 총회교육부장, 총회고시위원, 총회중앙교육원장, 총회교육원장, 서울신대 대우교수와 이사, 월간 활천 후원회장, 총회장 등을 역임했다.

교계 안에서는 서부지역교경협의회장, 강남교경협의회장, 기독교서부협의회 임원, 기독교신풍운동회장, 국가조찬기도회 고문, 국민일보 종교편집위원장, CBS 관리사장을 역임하는 등 폭 넓게 활동했다. 1970년 후반에 몇몇 기독교 단체가 군사정부의 유신헌법 반대기도회를 개최했는데 한국기독교신풍운동 임원이었던 최 목사는 유신헌법 반대기도회가 예언자적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참여했다. 2005년에는 제37회 국가조찬기도회 설교자로 나섰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장으로 이단사이비 단체를 가려내어 징계를 받게 했다. 한국교도소 성서보급회를 조직하여 교도소 수감자들에게 성경을 보내는 운동을 했다.

최 목사는 저술가이며 문필가로도 유명하다. 웨슬레안 강단, 날마다 새롭게, 목회와 신학 등 다양한 매체에 저술과 다수의 논설, 칼럼, 수필을 남겼다. 본지와 활천을 비롯해 교계 신문과 잡지에 많은 글을 기고했다. 은퇴 후에는 2006년 3월에 총회본부에 은퇴교역자의 예배처소인 ‘본부교회’ 창립에 관여했고 은퇴 교역자 친목모임인 성광회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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