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공작대의 교회당 점령 

故 이용신 목사(서호교회 원로)
故 이용신 목사(서호교회 원로)

이용신 목사는 1950년 청원군 가마교회 집사로 충실히 봉사했다. 1950년 6‧25사변으로 그의 고향 마을도 북한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 

이때 이용신 집사가 가마교회에서 주일 오전 오후와 수요일 저녁 예배에 설교를 담당하고 있었다. 인민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미 투옥하여 잔인한 고문을 가한 이용신 집사와 지역의 유지들을 한밤중에 결박하여 청주 무심천으로 끌고 가서 장총으로 집단 학살하여 큰 구덩이에 묻었다. 

이용신 집사도 학살의 현장에서 구덩이에 함께 묻혔는데 총탄을 맞지 않아 목숨이 붙어있었다. 잠시 천국에 다녀온 후 엉성하게 덮은 뗏장에서 스며드는 공기를 마시며 소생했다. 그와 함께 묻혔던 사람이 입으로 결박을 풀어줘서 희생자를 헤집고 구덩이에서 나왔다. 

이용신 목사는 1923년 9월 14일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가마리에서 출생했다. 1943년 교원시험에 합격하여 초등학교 교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창의력이 뛰어나 연구수업 발표에서 교과서의 천문분야에서 오류를 지적하기도 하여 교육청에서도 인정하는 유능한 교사였다.

1950년 6월 25일 북괴군이 소련제 탱크 등 월등한 무력을 갖춰 남한에 쳐들어올 때 그는 충북 청원군 사주면 농촌 마을 가마교회 집사로서 청원군 남이초등학교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7월 중순에 이르러 그가 거주하는 지역도 북괴군에게 점령되었다. 많은 주민이나 교우가 피난 갔다. 그러나 이용신 집사는 노친이 노환으로 위독하여 피난을 가지 못하고 있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점령군이 잠시 마을을 떠난 후 좀 조용한 기간에 선친이 별세하여 장례를 마친 한 주간 후였다. 이웃에 사는 교회 집사의 아들이 찾아왔다. 그는 교회는 나오지 않으나 선량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인민군의 정치공작대가 만든 한 기관에서 부역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은밀하게 일러준다. 새벽마다 선생님 집에서 찬송 소리가 나서, 불행한 사건이 올 수도 있으니 당분간 찬송가를 부르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는 공산당의 간접적인 압력이었다. 

비기독교인들은 고인을 위해 궤연(几筵)을 차려놓고 상식(上食)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용신 집사는 기독교 신앙 가정으로서 매일 새벽기도회를 하고 있었다. 새벽마다 찬송하는 소리가 들려 이를 문제 삼은 것이었다. 

집사의 아들은 친숙한 이웃의 처지에 간곡한 부탁으로 귀띔해준 것이었다. 그렇다고 새벽예배를 중단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용신 집사는 단호히 거절의 뜻을 밝혔다. 예배를 중지하라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단호히 거절의 뜻을 밝혔다. 

“이 사회에서 어차피 환영받고 살기는 글렀으니, 할 대로 하라. 깨끗이 죽을 것”이라고 답변하자 그는 민망한 듯이 물러갔다. 이용신 집사는 예배를 중지할 수 없었기에 그들의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교회는 그의 집에서 2km 되는 지역인데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주일 낮과 저녁, 수요일 저녁 이렇게 한 주간에 세 번씩 빠짐없이 공적인 예배를 드렸다. 교회에 교역자가 공석이었기 때문에 설교는 늘 이용신 집사가 했다. 그래도 아무런 말썽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민군 정치공작대가 교회당을 점령하고 강연회를 열고 있었다. 신성한 교회당이 무신론 공산주의 세력에게 점령당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전하는 장소로 변해 분노가 일었다. 성전을 사모하는 예수님처럼 격렬한 분노가 일어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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