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아짐의 정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낮아짐의 극치가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사람의 모양으로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우리와 더 깊은 관계를 맺으시기 위해 성육신하셔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은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가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일평생 살아가는 이유가 한 단계씩 올라가기 위함입니다. 

성육신은 세상의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성육신은 끊임없이 낮아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수준으로 올라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의 수준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육신의 원리를 적용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모든 계층이 하나로 어우러지려면, 우리의 영역에서 내려가야 합니다. 교회가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공동체가 되려면, 성육신의 원리가 필요합니다.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판단하고 정죄하면, 젊은이들이 다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과 판단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기준으로 내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공동체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공동체 안에서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 거슬리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너그럽게 봐주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고 나면, 다 달라집니다. 그런데 그들이 은혜를 받기 전에 우리가 정죄해버리면, 그들은 교회를 떠나버립니다. 교회는 죄인들을 위한 장소입니다.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입니다. 어떤 특정한 부류만 모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사춘기의 아이들과 부모 사이에 갈등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성육신의 원리를 배우지 않으면, 아이들을 끌어안을 수 없습니다. 관계 속에서 성육신이 매우 중요합니다. 상대방의 수준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상대방이 아이일 경우, 아이의 수준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실패했을 경우, 실패한 사람의 수준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원리입니다.

 

가장 낮은 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기 예수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색 비단에 싸이신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가난한 자들의 아기를 싸는 강보에 싸이셨고 예수님께서는 황금 침대에 누이신 것이 아니라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심은 자기를 낮추심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였습니다. 마귀가 아담에게 와서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유혹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의 깊은 내면에 숨은 죄성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원죄와 같은 죄가 교만입니다. 모든 죄의 출발지가 바로 교만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세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과 분쟁은 무엇 때문일까요? 모두들 높아지고자 하기 때문에, 모두가 올라가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높은 곳을 지향하고 다 정상을 좋아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평화의 삶을 원한다면 답은 딱 하나입니다. 내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내가 낮아지라는 신호입니다. 나의 내면에 불편함의 출처가 무엇인지 점검해 보면 틀림없이 그곳에는 높아진 마음이 있습니다.

얼마나 더 낮아져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기준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낮아진 만큼 우리가 낮아지는 것입니다. 낮아짐의 정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낮아짐의 극치가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13권의 서신서를 쓴 사도 바울은 사역 초기에 쓴 고린도전서에서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전15:9). 사역의 중기에 쓴 에베소서에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엡3:8). 사역 말기에 쓴 디모데전서에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고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회를 세우고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고 나서도 더욱 겸손하고 낮아지는 모습을 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에게 더 큰 은혜를 부으셨고 놀랍게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낮추심의 결과도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7~11)였습니다.

낮아지는 깊이 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낮아지는 깊이 만큼 높게 하셨습니다. 가장 낮고 낮은 곳까지 내려 가신 분을 하나님은 가장 높고 높고 높은 곳으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모두를 포용하는 마음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가장 부끄러워하고 또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마음 속에 오시기를 원하십니다. 왕궁 속에 태어나셨다면 목자가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마굿간에 오셔서 받아 들이지 않을 자가 없고 만나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바다가 왜 넓습니까? 세상의 모든 강들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바다가 품는 용량은 매우 큽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을 편견 없이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어떤 계층의 사람과도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꺼리는 계층의 사람과도 함께 하셨습니다. 여인들과 아이들까지 예수님의 가까이에 오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의 정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버림받음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받아들여주심을 상징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버림받으시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죄인들을 받아들여 주시는 포용력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인하여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모두 받아들여졌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들만이 관용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성육신의 원리를 적용하여 성탄 헌금을 주변의 이웃들을 섬기고 작은 교회를 섬기는데 사용하고 갈등의 원인인 높아지려는 마음을 내려 놓고 화합을 도모하며 포용력을 갖고 ‘관용이 없으면 미래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며 교회와 교단을 나누지 말고 모두를 품어내고는 성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