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다에 섰다.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살 속을 파고든다. 여름날 바닷가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이 떠나고 갈매기도 사라진 백사장엔 주인 없는 빈 보트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김남조 시인은 “겨울 바다에 가보니 새들도 죽고 없었고, 그대 생각을 했지만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얼어버렸다”고 했다.

지금 세계는 점점 혼란과 격랑의 파도 속에 흔들리고 있다. 마치 태초 천지가 창조될 때보다 더 무질서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북한의 미사일 도발, 제로코로나로 체제 붕괴의 위기를 맞고 있는 중국, 연례행사처럼 치뤄지는 한국 민주노총의 파업, 죽기 살기로 싸우는 여야 정치권….

과연 우리는 나라와 나라 간에 민족과 민족 간에 사랑과 평화와 배려와 공존이 함께 어우러질 수는 없을까? 창세기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천지가 탄생하기 전 땅이 혼돈과 공허와 어둠 속에 있었고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에 운행하셨는데 하나님이 빛을 만드셨다. 그리고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그분은 에덴동산에서 흙과 그의 영으로 지으신 아담을 그의 돕는 배필인 하와와 함께 살게 하셨다. 둘 사이에 아들이 생겼는데 가인과 아벨이다. 그러던 어느 날 형 가인이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고,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는 것에 화가 난 가인은 동생을 죽이게 되는데 이 사건으로 가인은 에덴에서 추방되어 이곳저곳을 유랑하게 된다. 그 후 그의 5대손 라멕이 태어난다.

라멕은 하나님이 정하신 일부일처제를 따르지 않고 여러 명의 아내를 둔 자이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그가 부른 ‘라멕의 노래’는 살인을 정당화하고 복수심과 교만으로 가득찬 인간의 타락한 심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라멕은 매우 뻔뻔스러운 자였다. 그는 자신의 5대조인 가인이 살인을 한 후 쫒겨나지만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그를 해하는 자는 벌을 일곱 배나 주겠다고 가인에게 증표를 준 일을 상기하며 스스로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자는 하나님의 벌이 칠십칠 배가 될 것이라 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가인의 후예이고 라멕의 자손이 되는 셈이니 공허와 혼돈과 어둠의 자녀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말이다. 

그분은 빛으로 오셨고 빛이 어둠에 비쳤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 마치 세상이 그분 때문에 지어졌지만,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던 것처럼….

그분은 세상에 오셔서 사랑을 알게 하셨고, 하나님은 그분을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또 한 번 맞는 성탄절, 우리에겐 진정한 성탄의 그리움이 있는가? 내가 누구인지 광음처럼 빠른 세월 속에서 수없이 맞는 성탄절의 의미를 알 수 없고 성탄의 캐롤이 잊혀져 간다면 우리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보다 나를 해하는 자는 칠십칠 배의 벌을 받을 것이라는 ‘라멕의 노래’가 더 가슴에 와닿는 어그러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지역마다 성탄트리의 불빛이 도시의 어둠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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