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때 구제활동과 동인동교회 개척

신학교를 졸업했으나 대구에는 박석근 목사가 부임할 교회가 없었다. 그는 성결교회가 장로교회보다 약세임을 깨닫고 성결교회 확장에 관심 가졌다. 당시 경상남북도가 영남지방회였는데, 1947년 안창기 목사가 지방회장이 되면서 지방성경학교를 개설해 박 목사는 성경학교의 실무자로 일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그는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에 불타 감격스러운 날로 보냈다. 그는 3년 전 조국이 갑자기 광복될 때 놀랐었다. 악랄한 일본 총독정치로 꿈도 꾸지 못할 광복을 하나님이 연합군을 통해 선물로 주신 것을 깨닫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했다.

1950년 6월 25일에 북한 인민군이 6.25 전쟁을 일으켜 남침했다. 그날이 주일인데 아침에 라디오 방송을 듣고 놀랐지만, 박 목사는 하나님께서 지켜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지켜주실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자고 했다.

국군은 북한군의 침략에 계속 밀려 8월 초에는 낙동강이 흐르는 경상남북도의 동쪽 땅을 제외한 전국이 적화되었다. 다행히 유엔군의 참전으로 공방전이 계속되고, 대구를 거쳐 부산이 임시 수도로 정해졌는데, 9월 말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를 회복했다.

다행히 대구는 피해지역이 아니었으나 전국에서 몰려온 피란민들로 날마다 북새통이었다. 전쟁으로 고아와 과부들이 거리를 헤맸고, 전쟁 중인 정부는 대책이 없자 박 전도사는 대구의 장로들을 찾아 고아원과 모자원을 설립하도록 요청하여 몇 곳으로 수용해 구호했다.

그는 선교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목사안수를 받아야 했다. 신학교를 나온 전도사지만 목회경력이 있어야 하겠기에 기도했더니 1951년에 비산동교회(김치영 목사)의 청빙을 받아 전도사로 부임해 일하다 1952년 그의 장로 경력이 인정되어 부산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53년에 휴전이 되자, 그는 세계구호위원회(WRC)의 경북지역 책임자가 되어, 미국 성도들이 보내온 구호물자(우윳가루, 강냉이 가루, 의복 등)를 받아 고아원과 모자원, 양로원 등에 우선 배급하였고, 미자립교회에도 급식소를 마련해 가난한 성도들에게 혜택을 베풀었다.

박 목사는 구호 활동을 하면서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깨달았다. 동시에 대구에 성결교회를 하나 더 세워 성결교회가 확장되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전시라 사회나 교회마다 어려운 형편이어서 교회들에게 지원을 호소할 수 없었다.

그는 개척을 위해 기도를 하다 전에 서문시장에서 번 돈이 하나님의 것인 줄 깨닫고 단독으로 개척을 결심하고 1953년에 길목이 좋은 동인동에 사비로 전셋집을 얻어 동인동교회를 개척했다. 이때부터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다 1년 후 역시 사비로 대지를 매입한 후 교회를 건축하고 배가운동을 전개하여 교세를 확장하여 오늘의 대광교회로 성장했다.

박목사의 성공적 목회와 역동적 구호 활동에 1959년 경북지방회장으로 당선되었고 연이어 회장을 했다. 그는 1962년 지방회장을 이듬해까지 연속했고, 또 1년을 쉬었다 1965년에 또 지방회장, 1968과 1969년까지 무려 8번이나 지방회장으로 봉사하여 지방회 발전에 공헌했는데 이는 지방회의 문제를 신속히 처리할 뿐 아니라 좋은 안건을 제안하는 행정력 때문이었다. 이후 1961년에 선배 정희섭 목사의 요청으로 목회지를 교환하여 대구의 중심지 대구제일교회로 부임한 것이 그의 활동성을 더욱 빛나게 했다. 그가 지방회장으로 탁월한 역량을 보인 것은 교단의 분열 때였다. 1961년 교단 총회 때 NCC 탈퇴안이 부결되자, 보수파들이 퇴장하여 따로 모임을 하고 1962년에 예성총회를 조직하므로 교단이 분열되었다. 경북지방회도 상당수 교회가 이탈하자 이를 수습키 위해 박석근 목사에게 또 지방회장을 맡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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