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티포스(기원전 4세기)는 굉장한 대식가였다. 한번은 플라톤이 그를 세워놓고 나무랐다. “자네가 먹을 양보다 훨씬 더 많은 생선을 산 것 같지 않나?” “맞아, 그렇지만 얼마 주지 않았는걸. 은화 두 닢밖에 안 줬어.” “오” 플라톤이 탄성을 질렀다. “그 가격이라면 나도 샀겠군.” “이봐.” 아리스티포스가 한마디 했다. “내가 먹성이 좋다면 자네는 욕심이 많군그래.”(아테나이오스, 『현자의 연회』 한글·이현경)

▨… 읽는 각도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보통사람들은 ‘먹성이 좋다’는 말보다는 ‘욕심이 많다’는 말에서 부끄러움을 더 느끼게 마련인 것 아닐까. 그 점에서 보면 아리스티포스는 플라톤에게 시원하게 한 방을 먹인 것으로 보인다. 철학자로서 알린 이름의 크기가 사람됨의 크기와 비례할 수는 없겠지만 그리스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리스티포스보다는 플라톤이 무거울 텐데 아리스티포스에게서 한 방 제대로 먹었다고 표현하면 플라톤이 화를 낼까?

▨… 어느 노(老) 목사가 은퇴를 앞둔 마지막 설교의 자리에서 고백했다. “저는, 설교의 인간적 불가능성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설교는 성령의 임재하심으로만 가능함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 설교 속에서 살아나기를 고뇌하며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나 설교 준비 중에 제 설교를 들을 이들을 먼저 머리에 떠올렸고 그분들의 반응을 예견하려고 머리를 굴리기까지 했었습니다. 그것은 말씀 선포가 아니라 듣는 자의 의중에 영합하려는 계산이었습니다.”

▨… 은퇴한 지 한참 된 목사의 고백은 목회 현장의 목사님들에게 아리스티포스의 먹성일까, 아니면 플라톤의 욕심일까. 안 했으면 좋을 괜한 고백을 했다고 역정 내실 분이 계실는지도 모르겠지만, 수백 수천 번의 말씀 선포의 자리에서 나의 말씀 선포를 듣는 이들의 반응이나 호불호 따위는 한 번도 염두에 둔 적 없노라고 못 박는 분이 있다면 박수 보내드리고 싶어 오지랖을 펼쳤다.

▨… “그리스도는 교회의 말씀 ‘안’에서만 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말씀으로서 다시 말해 설교라는 형태의 말해진 말씀으로서 현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현재는 설교로서의 현존입니다. 설교 안에 온전한 그리스도가 현재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무너집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설교 안에 현재하시는 그리스도’) 사람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되는 것은 그 말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묶으시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설교자가 설교의 자리에서 겸손해져야 하는 절대적 이유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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