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임직 활동과 교역자의 소명

당시 교회마다 신자의 수가 적었고, 또 신자들이 가난해서 십일조는 엄두도 못해 푼돈 같은 주일헌금, 또 가끔 드리는 감사헌금 등으로 유지하기에 교회의 재정은 늘 부족했다. 어느 해 그가 교회의 회계집사로 임명되어 교회의 재정상태를 살펴보니 한심했다.

당시 교역자의 사례금은 동양선교회에서 매월 일정액을 지원했으니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 금액은 자기 월급보다 적은데, 목사님 가족이 많아 생활의 어려움을 안 그는 선배 집사들을 설득하여 일정액을 생활비 보조로 교회에서 부담하여 걱정 없이 목회에만 힘쓰도록 했다.    

또 그는 교회의 신자들 중 극빈자들도 많아 그들을 조금이라도 구제해야 했는데, 교회 재정에 여유가 없어 이를 두고 기도했다. 그 결과 월급쟁이보다 상점을 차려 많은 이익을 얻으면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많이 드려 교회의 구실을 할 수 있는 지혜가 떠올라 결심했다.  

그는 대구 서문시장에 틈틈이 가서 여러 상인들과 만나 얘기도 들어보다가 마침내 포목상회를 선택한 후, 직장에 사표를 냈다.

그의 열성적 기도와 뛰어난 정직성과 폭 넓은 활동력으로 포목상회가 잘 되어, 교회의 재정에도 큰 도움 되어 구제활동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미국령 진주만을 폭격하므로 태평양전쟁을 촉발하여 전쟁을 치루는 고난의 시대가 왔다. 더구나 성결교회는 재림 문제로 활천과 신학교가 폐교되었고 전국의 성결교회도 1943년 12월에 강제해산 당했다.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교역자들도 각자 처신했다. 이때 박집사는 장사하면서 주일에는 장로교회에 출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에게 광복이 찾아왔다. 일본이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에게 항복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모든 일본인들이 고국으로 쫓겨 가고. 대구 서문시장을 장악한 일본인들이 사라지자, 박 집사의 포목상회는 더욱 크게 확장하였다.

그는 무엇보다 강제로 팔린 공평동성결교회를 다시 찾는데 앞장을 섰으며, 흩어진 신자들을 찾아다니는 등 교회의 주동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래서 1946년에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교회의 장로로 피택 되고 곧 장로가 되어 교회는 물론 지방회에서도 크게 활동을 했다.  

당시 영남경북지방 회의록에 이런 기사가 있었다. “박석근 장로는 1946년부터 기독교조선성결교회 영남교구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영남지역에 성결복음과 사중복음의 깃발을 높이고 적극 헌신하였다.”  

이는 당시 그의 폭넓은 지방회적 활동을 증명하는 기록이었다.  하지만 광복 직후의 한반도는 정치적으로 대혼란의 시기였다. 해방군의 명분으로 38선 남쪽에는 미국이 주둔하여 자유민주주의적 군정을 실시했다.

그러나 북한은 소련군이 주둔하여 공산당원 김일성을 내세워 ‘인민위원회’를 조직, 공산독재국가로 진행하고 있었다.  

남한에는 집회의 자유가 있어 지도자들의 소신에 따라 정당을 조직하여 좌파 우파 중도파 등으로 갈등이 야기되고 있었다.

북에는 소련의 독재로 공산당 외에는 정치활동을 엄금했고, 공산당을 반대하는 기독교를 박해하자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내려왔다.  

남한의 자유를 이용하여 김일성은 박헌영 남로당수를 파견했으나 미군정이 공산당을 불법으로 선언하자 숨어서 각종 폭동을 일으켜 사회를 혼란으로 몰았다.

그 중 하나가 대구의 위폐사건으로 남로당 자금 위해 위폐(1.200만 원)어치를 인쇄, 사용하다 적발돼 대구가 난리였다.  

이 사건으로 박 장로는 큰 충격을 받아 열심히 기도했다. 결국 세상나라는 잠간이요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함을 깨닫고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 내려놓고 1946년 서울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공부와 기도에 매진, 1948년에 졸업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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